그 깃발, 서럽게 펄럭이는 박정대
기억의 동편 기슭에서 그녀가 빨래를 널고있네.
기억의 빨랫줄에 걸려 함께 허공에서 펄럭이는 낡은 집 한 채
조심성없는 바람은 창문을 흔들고 가네.
그 옥탑방 사랑을 하기엔 다소 좁았어도
그 위로 펼쳐진 여름이 외상장부처럼 펄럭이던 눈부신 하늘이,
외려 맑아서 우리는 삶에,
아름다운 그녀에게 즐겁게 외상지며 살았었는데
내가 외상졌던 그녀의 입술해변처럼 부드러웠던 그녀의 허리
걸어 들어갈 수록 자꾸만 길을 잃던 그녀의 검은 숲 속
그녀의 숲 속에서 길을 잃던 밤이면
달빛은 활처럼 내 온몸으로 쏟아지고
그녀의 목소리는 리라 목소리처럼 이름답게 들려 왔건만
내가 외상졌던 그 세월은 어느 시간의 뒷골목에
그녀를 한 잎의 여자로 감춰두고 있는지
옥타비오 빠스를 읽다가 문득 서러워지는 행간의 오후
조심성 없는 바람은 기억의 책갈피를 마구 펼쳐 놓는데
네 아무리 바람 불어간들 이제는 가 닿을 수 없는,
오 옥탑 위의 옥탑 위의 빤스,
서럽게 펄럭이는 우리들 청춘의 아득한 깃발
그리하여 다시 서러운 건 물결처럼 밀려오는 서러움 같은 건외상처럼
사랑을 구걸하던 청춘도 빛바래어
이제는 사람들 모두 돌아간 기억의 해변에서
이리저리 밀리는 물결 위의 희미한 빛으로만 떠돈다는 것
떠도는 빛으로만 남아 있다는 것
박정대 시인
1965년 강원도 정선에서 출생했다.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1990년 『문학사상』에 <촛불의 미학>외 6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시집으로는 <단편들><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가 있으며,
김달진문학상, 소월시문학상등을 수상했다.
현재 『목련통신』편집장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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