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ina (中國)

자금성(紫禁城) III

Chris Yoon 2021. 10. 31. 15:28

 

정양문 앞에는 전루가 있고 그 뒤에는 모주석 기념관, 인민영웅기념비가 있고 그 뒤에는 천안문이 있다.

정양문은 북경성 내성 남쪽 가운데에 위치한 문으로 지금은 없어졌지만 동에는 숭문문, 서에는 선무문이 있었다.

황제만이 출입할 수 있었던 북경성 내성의 정문으로 국문(國門)이라고도 했는데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나는 문이었다.

앞에 기와 지붕만 아니면 마치 현대의 빌딩과도 같은 벽돌로 만든 거대한 누각이 있는 건물은 정양문에 딸린 방어시설로

전루라고 한다.

원래는 정양문 앞에 옹성으로 둘러져 있었고 그 앞에 있는 전루는 이름에 화살 전(箭)자를 쓴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수많은 구멍에 군사를 배치하여 활이나 총을 쏘아서 성을 방어하는 방어시설이다. 1419년 처음 세워졌는데 지금 남아있는 것은 의화단 난 때 북경에 진입한 8국 연합군에 의해 파괴된 것을 중화민국 초기에 다시 세운 것이다.

 

왕조의 유산인 정양문 뒤로는 공산국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상징적인 유산이 펼쳐진다.

도시의 가장 중심이며 상징성 있는 이 공간 중심축에 모주석 기념관이 있는데 이 곳에 마오쩌뚱의 방부 처리된 시신이 있다.

그 뒤로는 인민영웅기념비, 커다란 국기 게양대가 있다. 중국인이라면 한번은 와 봐야 한다는 곳으로 국가주의의 상징인 곳이라 할 수 있다.

동으로는 중국국가박물관, 서로는 국회의사당이라고 할 수 있는 인민대회당이 있는데 하나같이 개성이 없지만

거대한 건축물들이다.

그 사이에 있는 천안문 광장은 100만명이 모일 수 있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도시 광장이다.

공산주의 국가들은 권력을 과시하고 민중을 동원하여 체제를 선전하기 위한 거대한 광장을 건설했는데

소련에는 붉은 광장, 북한에는 김일성 광장이 있듯 중국에는 천안문 광장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이 선포된 이곳은 국가적으로 의미가 깊은 장소인데 숱한 국가행사와 민중집회가 열렸던 곳이며

1989년에는 이 곳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인사들과 학생들에게 현재의 정부는 무자비한 탄압과 학살을 자행한

끔찍한 장소이기도 하다.

 

 

 

태화전은 1420년 봉천전으로 처음 세워지고 황극전으로 개칭되었다가 1645년 태화전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벼락을 맞아 불에 타기도 하는 등 여러번 재건되었는데 지금의 건축물은 1695년에 세워진 것이다.

백옥석으로 높은 3단의 기단을 세워 웅장한 느낌을 주며 붉은색 기둥과 황금색 지붕은 자금성 중심 건물로

황제의 위엄을 내뿜는다.

기단 가운데 계단은 황제만이 지나다닐 수 있는 것으로 가운데 답도가 있다.

여기에는 용과 파도, 구름 무늬가 새겨져 있다.

여기에 황제가 지나가는데 계단도 아닌 이곳을 황제가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가마꾼들이 계단 양쪽으로 황제가 탄 가마를 들고 가는 것이다.

 

 

 

마지막 황제 푸이와 첫째 부인 황후 완룽

 

 

마지막 황제 푸이의 여인들을 언급하자면 1922년 결혼을 하여 첫째 부인 황후 완룽과 둘째 부인 원슈이다.
1906년에 만주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원슈와 경합을 벌인 끝에 푸이의 선택으로 1922년 황후로 책봉되었다.
그녀는 상당히 빼어난 외모로 거문고, 바둑, 글, 그림에 능하였다고 한다.

초반에는 금슬이 좋았으나주변 상황의 급변과 외로움에 차츰 아편에 손을 대게 되고 정신질환을 앓았다.
만주국 황후가 된 이후에는 일본군관 사이에 사생아를 낳는데 푸이가 일본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될까 두려워

화로에 던져 죽였다고 한다.
일본 패망 때 전범으로 잡혀 수용소에서 폐결핵과 아편중독으로 1946년 쓸쓸히 사망한 비운의 여인이다.

 

원슈는 역시 1922년 숙비로 책봉되었는데 자금성에서 쫓겨난 이후 이혼을 요구한 후 푸이에게 떠나

1931년 이혼하고 평민으로 살다가 1953년에 사망했다.

세번째 부인은 1937년 결혼한 귀인 탄위링으로 결혼 당시 17세의 학생이었다.

1942년 원인 모를 병으로 죽는데 일본인들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설도 있다.

푸이가 사진 뒤에 '나의 가장 사랑하는 위링'이라는 글을 적어놓기도 했을 정도로 가장 사랑했던 여인이었는데

이후 둘은 2006년에 합장되었다.

탄위링 사망 후에 맞아들인 네 번째 부인은 복귀비 리위친으로 1928년생으로 당시 15세였는데

얼마뒤에 일본이 패망하여 푸이가 전범으로 잡히게 되면서 떨어지게 되고 탁아소를 운영하면서

푸이를 면회오기도 했지만 황제의 첩이라는 비난을 견디지 못 하고 1958년 푸이와 이혼한다.

이후 어느 기술자와 재혼하여 살다가 2001년 사망하였다.

푸이는 1959년 특사로 풀려나게 되는데 정부의 주선으로 1962년 결혼한다.

그녀는 다섯번째 부인 이수셴으로 당시 37세의 간호사로 1962년 푸이가 사망할 때까지

마지막 5년을 함께 했고 1997년 사망한다.

푸이는 일생동안 총 5명의 부인을 두었지만 자손을 남기지 못 했다.

 

 

 

 

 

 

 

자금성(紫禁城)안의 LOVE TREE

 

 

자금성(紫禁城)안에는 나무 한 그루가 없음을 지난회에 이야기 했었다.

이유인즉 자객들이 황제를 害하려 숨어 들었을때 혹시 검푸른 나무그늘에 숨어들지 않을까?.. 해서

아예 나무 한 그루 없는 자금성(紫禁城)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토록 어린시절엔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등극했건만 불운의 황제로 전락하여 그의 슬하에는 자식이 하나도 없다

마음 짠하게 자금성(紫禁城)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후문 가까이에 서양인들과 동양인들이 함께 많이도 줄을 길게 서있다

무슨 일인지 가까이 가보고 나는 빙긋 웃고 말았다.

자금성(紫禁城) 뒷뜰에 향나무가 오직 한 그루 있다.

원래 향나무는 향이 좋다하여 옛부터 예를 갖추는 날에는 향불을 지폈었다.

수명도 길고 나무의 모양새도 세월이 지날수록 보기가 좋은 나무다. 오래 될수록 굽고, 휘고, 세월을 흔적을 발휘하는 나무다. 그런데 자금성의 향나무도 무척 오래되어 뒤틀리고 굴곡진것이 마치 마지막 황제 푸이 만큼이나 모진 풍파를 겪은듯 하다.

뿐만 아니라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두 그루인데 두 그루가 서로 엉켜붙어서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 얼싸 안은듯 하다

이 나무를 사람들은 Love Tree(사랑나무)라고 부른다 한다

그래서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부부금술도 좋아지고 행운이 뒤 따른다 하여 너,나 할것없이 다투어 이곳에서

기념촬영들을 해간다고 한다.

 

내가 누구인가?

평소에는 말 한 마디 못하는 숙맥이다가도 사진촬영 건수만 보면 바람처럼 날아가 기어코 해내고야 마는,

때론 남의 불행도 내 일처럼 가슴 아파하고 더 행복해질 수있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얻어내고야 마는 악바리 근성이 있는 포토그래퍼가 아니던가?

나도 일단 줄을 섰다.

그리고 가이드를 해주는 아들아이에게 대략 내뜻을 전했다.

" 한 장만 찍지말고 빨리빨리 포즈를 바꿀테니 연속적으로 많이 찍어라."

그리고 내 차례가 되어 능수능란하게 아내를 옆에 세우고 여러가지 포즈를 취하며 촬영을 진행 했다.

표정하나 놓지지 않고 활짝 웃어가면서...

자기 차례가 돌아와 나무앞에서 뻣뻣하게 화난 표정으로 부동자세를 취하는 동양의 관광객들,

점잖게 미소지으며 품위를 지키던 서양인 관광객들에게 보라는듯 탤런티드하게 진행모습을 보여주다보니

줄을 서있던 관광객들도 웃으며 환호를 보내주었다.

 

Bravo!

마지막 황제, 푸이시여. 저 세상에서는 편안하고 행복 하시길...

저는 당신이 못 다한 행복을 이토록 대신 누리고 있습니다.

 

 

- Chris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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