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이 속절없이 지나가고있다
11월의 딱 중간, 15일.
다시 시작하기로는 이미 늦었고, 그렇다고 모두 다 사라진 것도 아닌 달,
11월. 詩人들도 11월의 떠나감을 애석해하면서 詩를 지은듯하다
그중 내 마음에 드는 시와 사진들을 모아보았다
여기 올려지는 시들은 적어도 내가 암송하고 싶었던것들,
그리고 사진들도 틈틈이 내가 찍고 모은것들이다
Chris Nicolas
그리운 편지 이응준
그 도시에서 11월은 정말 힘들었네
그대는 한없이 먼 피안으로 가라앉았고
나는 잊혀지는 그대 얼굴에 날 부비며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가에 대하여
덧없이 많은 날들을 기다렸지만
무엇이 우리 주위에서 부쩍부쩍 자라나
안개보다도 높게 사방을 덮어가는가를
끝내 알 수는 없었네
11월이 너무 견디기 어려웠던 그 도시에서
그대가 가지고 있던백 가지 슬픔 중에
아흔아홉으로 노래 지어 부르던
못 견디게 그리운 나는
내가 사랑하는 계절 나태주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달은11월이다
더 여유있게 잡는다면 11월에서 12월 중순까지다
낙엽 져 홀몸으로 서 있는 나무
나무들이 개끔발을 딛고 선 등성이
그 등성이에 햇빛 비쳐 드러난
황토 흙의 알몸을좋아하는 것이다
황토 흙 속에는
時祭 지내려 갔다가
막걸리 두어 잔에 취해
콧노래 함께 돌아오는
아버지의 비틀걸음이 들어 있다
어린 형제들이랑 돌담 모퉁이에 기대어 서서
아버지가 가져오는 對送 꾸러미를 기다리던
해 저물녘 한 때의 굴품한 시간들이숨쉬고 있다
아니다
황토 흙 속에는
끼니 대신으로 어머니가 무쇠솥에 찌는
고구마의 구수한 내음새 아스므레 아지랑이가 스며 있다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계절은
낙엽 져 나무 밑둥까지 드러나 보이는
늦가울부터 초겨울까지다
그 솔직함과 청결함과 겸허를
못 견디게 사랑하는 것이다
노숙 박진성
십일월 은행잎에 누웠다
새벽 고요 부서지는 소리
응급실보다 환했다
아스팔트 뒤덮은 잎맥들은 어느 나라로 가는 길인가
등짝에 달라붙은 냉기를 덥히느라 잎들은 분주하다
갈 곳 없는 내력들처럼 잎잎이 뒤엉킨 은행잎
사원에서 한참을 잤다
사랑할 수 없다면 마지막 길도 끊어버리겠다
은행잎 한 잎, 바스라져 눈가에 떨고 있었다
마음의 정거장 김명인
집들고 처마를 이어 키를 낮추는때
절은 국도변 따라 한 아이가 간다
그리움이여, 마음의 정거장 저편에 널 세워두고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면
저기 밥집 앞에서 제재소 끝으로
허술히 몰려가는 대낮의 먼지바람
십일월인데 한겨울처럼 춥다
햇볕도 구겨질 듯 펄럭이는 이발소 유리창 밖에는
노박으로 떨고 선 죽도화 한 그루
그래도 피우고 지울 잎들이 많아
어느 세월 저 여린 꽃가지 단풍 들고
한 잎씩 저버리고
가야 할 슬픔인듯 잎잎이 놓아버려
텅 비는 하늘
무등차 김현승(1913 - 1975)
가을은술보다차 끓이기 좋은 시절 ...
갈가마귀 울음에산들 여위어 가고,
씀바귀 마른 잎에바람이 지나는,
남쪽 11월의 긴긴 밤을,
차 끓이며끓이며외로움도 향기인양 마음에 젖는다
11월 고재종
갱변의 늙은 황소가 서산 봉우리 쪽으로 주둥이를 쳐들며 굵은 바리톤으로 운다
밀감빛 깔린 그 서쪽으로 한 무리의 고니가 날아 봉우리를 느린 사박자로 넘는다
그리고는 문득 텅 비어 버리는 적막 속에 나 한동안 서 있곤 하던 늦가을 저녁이 있다
소소소 이는 소슬바람에 갈대숲에서 기어나와 마음의 등불 하나하나를 닦아내는 것도 그때다
11월 나희덕
바람은 마지막 잎새마저 뜯어 달아난다
그러나 세상에 남겨진 자비에 대하여 나무는 눈물 흘리며 감사한다
길가에 풀들을 더럽히며 빗줄기가 지나간다
희미한 햇살이라도 잠시 들면거리마다 풀들이 상처를 넣어 말리고 있다
낮도 저녁도 아닌 시간에
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에
모든 것은 예고에 불과한 고통일 뿐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지만
모든 것은 겨울을 이길 만한 눈동자들이다
11월 박영근
바람은 나무들이 끊임없이 떨구는 옛기억들을 받아
저렇게 또다른 길을 만들고
홀로 깊어질 만큼 깊어져
다른 이름으로 떠돌고 있는 우리들 그 헛된 아우성을 쓸어주는구나
혼자 걷는 길이 우리의 육신을 마르게 하는 동안
떨어질 한 잎살의 슬픔도 없이
바람 속으로 몸통과 가지를 치켜든 나무들
마음 속에 일렁이는 殘燈이여
누구를 불러야 하리
부디 깊어져라
삶이 더 헐벗은 날들을 받아들일 때까지
11월 이외수
세상은 저물어 길을 지운다
나무들 한 겹씩 마음 비우고
초연히 겨울로 떠나는 모습
독약 같은 사랑도 문을 닫는다
인간사 모두가 고해이거늘
바람은 어디로 가자고 내 등을 떠미는가
상처 깊은 눈물도 은혜로운데
아직도 지울 수 없는 이름들
서쪽 하늘에 걸려
젖은 별빛으로 흔들리는 11월
11월 이해리
끝끝내 닿지 못할 막막함으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 있는
달력 속의 날짜, 11월
산막처럼 텅 빈 글자의 행간으로
가을은 차츰 침묵의 심지를 낮춘다
거리에 나서면 바람이 끌다버린
나뭇잎 우수수 목조 벤치 아래 굴러 다니고
아직 채 옷깃 여미지 못한 목덜미 속으로
방촌역 차단기 앞에 멈춰 선 저녁 안개 감겨온다
시간이여 계절이여
꿈꾸었던 것들과 제때에 닿는 일 드물고
모든 소원하는 것들은 뿔뿔 흩어지거나 뒤늦게 이루어졌다
홑이불처럼 가난한 마음 위에
누덕누덕 그리움만 차 오르고
빈 수레 가득 흰 이슬 날리며 바람떼는
어느 멀고 나지막한 마을로 떠나간다
바닥 드러낸 등잔처럼 희미한 내 그림자
막다른 골목처럼 서늘히 서 있는데
11월 정끝별
기와를 넘는 개오동나무 그늘은 살얼음을 만들지
밤이면 바람은 웅웅 얇은 창호지문을 흔들어
어린 영혼에 커다란 손자국을 내고 지나갔지만
유독 빈 축사에 가득했던 갓 구운
한낮의 햇살을 좋아했어
호박오가리처럼 앉아
검은 옷자락에 싸여있던 白木의 수녀원 앞들과
잿빛 장삼을 끌고가는 맨머리가 무서워 울곤 했어
스스로를 감추려고 푸른 이끼를 덮어쓴 얼음 같았던 사람들
낯선 것들은 그렇게 세상 밖에 있었던 거야
오일장이면 얼굴에 회칠을 한 미친 여자는
여자만 보면 욕을 했어
머리가 숭숭 빈문둥이나 걸인도 많아 나는 턱숨 세워달리곤 했지
한결같이 웅크린 채 좁아만 들던 그 길에서
엄마 손을 놓칠 때마다 덮쳤던 아모레 아모레미오
노란 꽃 낯선 것들의 오한
다투는 소리 뿌연 쌀먼지로 일던 네거리 정미소집에 굳게 닫혀있던 긴 욕설들
누구였을까 유난히 그늘 깊은 영산강물에
담댕이 햇살에 함부로 나를 심더니
통채로 뽑아버린 일곱 살 가시처럼
낯설어 멀기만한 그 십일월
11월 조용미
한밤물 마시러 나왔다
달빛이 거실 마루에 수은처럼 뽀얗게 내려앉아
숨쉬고 있는 걸 가만히 듣는다
창 밖으로 나뭇잎들이 물고기처럼 조용히 떠다니고 있다
더 깊은 곳으로
세상의 모든 굉음은 고요로 향하는 노선을 달리고 있다
11월 최갑수
저물 무렵 마루에 걸터 앉아
오래 전 읽다 놓아두었던 시집을 소리내어 읽어본다
십일월의 짧은 햇빛은 뭉툭하게 닳은 시집 모서리
그리운 것들 외로운 것들, 그리고 그 밖의 소리나지 않는 것들의 주변에서만
잠시 어룽거리다 사라지고
여리고 순진한 사과 속 같은 십일월의 바람은 또 불어와
시 몇편을 슬렁슬렁 읽어 내리고는 슬그머니 뒤돌아서 간다
그 동안의 나는 누군가가 덮어두었던 오래된 시집
바람도 읽다만 사랑에 관한 그렇고 그런 서너 줄 시구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길을 걷다 무심코 주워 보는 낙엽처럼
삶에 관한 기타 등등이 아니었을까
시집을 덮고 고개를 들면
더 이상 그리워할 일도
사랑할 일도 한 점 남아 있지 않은
담담하기만 한 십일월의 하늘
시집 갈피 사이 갸웃이 얼굴을 내민 단풍잎 한 장이
오랜만에 만난 첫사랑처럼 낯설고 계면쩍기만 한데
11월, 다섯 줄의 시 류시화
차가운 별
차갑고 멀어지는 별들
점점이 박힌 짐승의 눈들
아무런 소식도 보내지 않는 옛날의 애인아,
나는 11월에 생을 마치고 싶었다
11월에 정채봉
만추면서 겨울로 들어서는 길목
화장 지우는 여인처럼 이파리를 떨구어 버리는 나무들 사이로 차가운 안개가 흐르고
텅 비어버린 들녘의 외딴 섬 같은 푸른 채전에 하얀 서리가 덮이면
전선줄을 울리는 바람 소리 또한 영명하게 들려오는 것이어서
정말이지 나는 이 11월을 좋아하였다
삶에 회의가 일어 고개를 숙이고 걷다가도
찬바람이 겨드랑이께를 파고들면
'그래 살아보자'하고 입술을 베어 물게 하는 달도 이달이고
가스 불꽃이 바람 부는대로 일렁이는 포장마차에 앉아서
소주의 싸아한 진맛을 알게 하는 달도 이달이며
어쩌다 철 이른 첫눈이라도 오게 되면
축복처럼 느껴져서 얼마나 감사해한 달인가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정희성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나던 순간
지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어느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 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나던 순간
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
11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나부끼네
11월의 나무 도종환
십일월도 하순 해 지고 날 점점 어두워질 때
비탈에 선 나무들은 스산하다
그러나 잃을 것 다 잃고버릴 것 다 버린 나무들이
맨몸으로 허공에 그리는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건 이 무렵이다
거기다 철 이른 눈이라도 내려 허리 휘어진 나무들의 모습은 숙연하다
이제 거둘 건 겨자씨만큼도 없고 오직 견딜 일만 남았는데
사방팔방 수묵화 아닌 곳 없는 건 이 때다
알몸으로 맞서는 처절한 날들의 시작이 서늘하고 탁 트인 그림이 되는 건
11월의 나무 황지우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이 마구 가렵다
주민등록번호란을 쓰다가 고개를 든 내가 나이에 당황하고 있을 때,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일정시대 관공서 건물 옆에서
이승 쪽으로 측광을 강하게 때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나이를 생각하면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11월의 나무는그렇게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나는 등 뒤에서 누군가,
더 늦기 전에 준비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11월의 느티나무 목필균
점점 체온을 잃어가는 너를 위해 햇살 한 줌 뿌려본다
추워질수록 걸친 옷가지 훌훌 벗어 던지는 자학의 몸짓들
다 쓸려 사라져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먼길을 뿌리로 서서
너는 시린 바람 안으로 채우며 한 해의 칼 금을 긋고 있구나
11월의 비가 정대구
우수수 하루 종일 흔들리는 11월의 찬비
줄 끊긴 비파
비파비파 아랫도리가 썰렁하다
두꺼운 얼굴의 겨울이 몇 걸음 앞당겨
성큼 성큼 등 뒤에 바짝 붙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재촉하여 빠르게 길을 몰고 가는 저녁
강원 영동과 중북부 지방에는 대설주의보가 내려졌다는데
이곳 경남지방은 웬 비가 비비비 悲悲悲
11월의숲 심재휘
가을이 깊어지자 해는 남쪽 길로 돌아가고
북쪽 창문으로는 참나무 숲이 집과 가까워졌다
검은 새들이 집 근처에서 우는 풍경보다
약속으로 가득한 먼 후일이 오히려 불길하였다
날씨는 추워지지만 아직도 지겨운
꿈들을 매달고 있는
담장 밖의 오래된 감나무에게 작별인사를 한다
이제 나는
숲이 보여주는 촘촘한 간격으로 걸어갈 뿐이다
여러 참나무들의 군락을 가로질러 갈 때
옛사람 생각이 났다
나무들은 무엇인가를 보여주려고
자꾸 몸을 뒤지고는 하였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길쭉하거나 둥근 낙엽들의
기억에 관한 것밖에는 없다
나는 내가 아는 풀꽃들을 떠올린다
천천히 외워보는
지난 여름의 그 이름들은 그러나
피어서 아름다운 순간들에만 해당한다
가끔 두고 온 집을 돌아보기도 하지만
한때의 정처들 어느덧 숲이 되어 가는 폐가들
일찍 찾아온 저녁의 기운에 낙엽 하나가
잔 햇살을 보여주기도 감추기도 하며 떨어진다
사람들은 그 규칙을 궁금해하지만 지금은
낙하의 유연함을 관람하기로 하는 때 그리하여
나는 끝없이 갈라진 나뭇가지의 몸들을 만지며
내가 걸어가는 11월의 숲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할 뿐이다
11월을 빠져나가며 정진규
흙담장에 걸린 먼지투성이 마른 씨래기 다발들
남루한 내 사랑들이 버석거린다
아직도 이파리들 땅에 내려놓지 못할 몇 그루 은행나무들이 이해되지 않으며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다른 이들의 철 지난 사랑이 이해되지 않는다
혼자서 돌아오는 밤거리 골목길에 버려진 고양이들이 날로 늘어나고
나는 자꾸 올라가고 있는데 계단들은 그만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며 비어지고 있다
빈 계단들이 허공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다
이제 너에게로 돌아가는 길은 위기로만 남아 있구나
골목길 들어서면 겨우 익숙한 저녁 냄새만 인색하게 나를 달랜다
이 또한 전 같지 않다
12월 때문에 11월은 가장 서둔다
끝나기 전에 끝내야 할 일들이 한꺼번에 들통나고 있다
야적까지 하고 있는 빈터, 그빈터에서도 우리도 서둘러 끝내자
내리는 눈이라도 기념으로 맞아두자
마른 풀대들은 물론이거니와 나무와 나무들 사이가 분명해지고
강가에 서면 흐르는 물소리들도 한껏 야위어 속살 다아 보인다
서로 벌어져 있다
가장 견고하다는 네 사유의 책갈피도 여며지지 않는다
머물렀다고 할 수 없다
서둘러 11월은 빠져나갈 수 밖에 없다
11월이 가는 갈밭 길에서 김동규
처음에는 문득, 바람인 줄 알았다
娼婦의 賣笑같은 까칠한 소리로
살과 살을 비벼대다 드러눕던 몸짓,
바람 가는 길목을 지키고 섰다가
혼절하는 몸소리로 제 허리를 꺾어
속 대를 쥐어 틀어 물기를 말리고
타오르는 들불의 꿈을 꾸며 잠이 든
늙은 갈대의 가쁜 숨소리
11월이 가는 갈밭 길에는,
빠른 걸음으로 노을이 오고
석양마다 숨이 멎던, 하루를 또 보듬으며
목 젖까지 속울음 차오르던 소리를
처음에는 문득, 바람인 줄 알았다
11월이 지나는 산굽이에서 최하림
11월이 지나는 겨울의 굽이에서 공기는 무겁게가라 앉으며
가지를 늘어뜨리고 골짜기는 입을 다문다
토사층 아래로 흘러가는 물도 소리가 없다
강 건너편으로 한 사내가 제 일정을 살피며 가듯이
겨울은 둥지를 지나 징검다리를 서둘러 건너간다
시간들이 건너간다 시간들은 다리에 걸려 더러는 시체처럼 쌓이고
더러는 썩고 문드러져 떠내려간다
아들아 너는 저 시간들을 돌아보지 말아라
시간들은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아니다
시간들은 거기 그렇게 돌과 같이 나둥그러져 있을 뿐 ...
시간의 배후에서는 밤이 일어나고 미로 같은 안개가 강을 덮는다
우리는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아직도 골짜기에서는 나무들이 기다리고 새들이 기다리고 바람이 숨을 죽인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오래도록 걸음을 멈추고 있어야 한다
입동이후 이성선
가을 들판이 다 비었다바람만 찬란히 올 것이다
내 마음도 다 비었다누가 또 올 것이냐
저녁 하늘 산머리기러기 몇 마리 날아간다
그리운 사람아내 빈 마음 들 끝으로
그대 새가 되어언제 날아올 것이냐
하늘색 나무대문 집 권대웅(1962 - )
십일월의 집에 살았습니다
종점에서 내려 가파른 언덕을 올라
얼키설키 모인 집들과 몇 개의 텃밭을 지나
막다른 골목 계단 맨 끝 문간방
그집에서 오랫동안 가을을 바라다보았습니다
창문 밑에서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나팔꽃. 해바라기
저녁의 적막을 어루만져 주던 가문비나무
가끔 아주까리 넓은 잎사귀가 슬픔을 가려주기도 했습니다
오랫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창 밖을 바라보았습니다
담장 너머 이어지던 지붕과 지붕들
그 위로 햇빛이 만들어놓던 빛나던 개울들
황금여울을 따라 저녁의 끝까지 갔다 왔습니다
돌아오면 처마 밑 어둠이 뚝뚝 떨어지고
어디선가 쌀 일구는 소리 너무 커 적막해라
눈을 감고 술렁이는 내 마음 속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리운 것이 너무 많아 불을 켜기 힘든 저녁
하늘색 대문을 열고 나가 해바라기가 서 있던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나팔꽃 까만 눈동자처럼 한 시절 야물딱지게 맺히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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