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南 Europe

스페인 여행기 / Gipsy I

Chris Yoon 2021. 10. 21. 06:26

 

Gipsy.

이 세상에는 종족도 많고 인종도 많지만 짚시만큼 자신의 나라가 없으면서도 그 종족이 이어지는 종족도 흔치않다.

어느 나라든지 짚시를 멸시하고 못 마땅해 하지만 그들의 타고난 예술혼은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점이다.

또한 그들은 전쟁이나 큰 일이 있을때도 많은 도움을 주었던 존재들이다.

나는 짚시의 삶을 생각하면 '리듬'이라는 한 음절의 단어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내 생에서 리듬은 시간과 공간에 의해 규정된채 우리의 신체와 영혼 속 깊이 프로그램 되는 일종의 언어이다.

시들은 어떤 일면에서 보면 국외에 체류하는 예술가 집단의 의미를 갖는다.

지리적으로 그들은 자신의 삶의 체취가 묻은 토양을 떠나 이방인의 땅에서 감성과 예술의 혼을 전하는 사람들이다

모국을 떠나 이방인의 땅에 들어가는 사람에게는 감수해야 할 위험이 너무나 크고 많다.

우선 예술가에게 있어 모국의 풍토속에서 빚어내려온 언어와 예술적 뉘앙스들을그대로 안고 새로운 땅에 정착한다는 것은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짚시들은 강인하게 잘 적응하고 있다.

스페인에도 많은 짚시들이 있다. 그들은 이제 그들의 예술을 인정받아 성공한 사람들도 많고 저녁이면 자신의 일하는 곳으로 나가는데 거의 Bar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는데 이제 그들에 대해서 살펴보자.

우선 이들이 사는 동네를 가보았다고 하니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앞에서 밝힌바와 같이 나는 그날 짚시와 마신 술에 무척 취해 있었다.

그래도 안좋은 사진을 보정하여 몇 장 올려본다.

 

세크라멘토(Sacromonte)
세크라멘토는 집시들의 거주지이다.

이곳에선 짚시들이 살고 있는 동굴집(Cueva)들을 볼 수 있다.

짚시들이 그라나다 탈환 당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데 공을 세운 대가로 사크라몬테 언덕을 정착지로 받았다고 한다.
짚시들은 언덕에 구멍을 파 동굴집을 만들어 살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도 동굴집의 생활은 계속되고 있다.
세크라멘토(Sacromonte)는 그라나다에서 무슬림 외에 또 하나의 이방인 문화가 발전한 곳으로
천덕꾸러기 집시들의 척박한 삶과 애환이 담겨져있는 곳이다.

 

 

 

시들 사이에서도 빈부의 격차가 있다.

위 두 장의 사진, 동굴집들은 짚시들 동네에서도 빈민가이다. 그리고 아래 두 장의 사진, 흰색 집들은 대문도 있고 전기도 들어오는 여유가 있는 짚시의 집이다.

잘 사는 짚시들은 비버리 힐스처럼 산 위에 집을 짓고 살고 못 사는 짚시들은 산 아랫동네에굴을 파고 산다.

밖에서 보면 매우 작은 것 같은데 안에는 상당히 깊게까지 굴이 파여 있다.
동굴집은 불법이기 때문에 주소가 없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돈이 있는 짚시들은 동굴집 앞에 대문과 방을 내달아 허가를 받아 전기도 신청할 수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집들이 튀어나온 부분은 작지만 안은 꽤 넓직한 동굴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의 집에 들어가보면 대문만 들어가면 동굴집으로 변하는데 무려 방이 8~10개 까지 있으며 이웃과 통하기도 한다. 생각했던 것보다 지저분하지않고 정돈이 잘되어 있다.

 

 

서글픈 유랑민족 '집시'

'집시'(Gipsy).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은 단어이다.

우리가 즐겨듣는 음악 중에도 집시를 소재로 한 노래가 무척 많다.

클래식 음악도 별반 다르지 않다. 사라사테의 <치고이네르바이젠>을 비롯해, 리스트, 브람스의 작품에서도 집시는 주요 소재였다. 그렇다면 집시는 어디에서 온 민족일까?

서기 8세기경 인도 북서부 라쟈스탄 지역에서는 대규모 민족의 이동이 시작됐다.

이들이 왜 갑자기 이동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들 민족은 참으로 기나긴 여정을 거쳤다.

인도를 떠나, 페르시아(오늘의 이란), 아르메니아, 비잔틴제국을 거쳐 마침내 14세기에 남동부유럽에 도착했다.

15세기에는 서유럽에까지 진출했는데, 당시 유럽인들은 이들의 짙은 피부색 등 이국적인 외모를 보고 이집트인으로 착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은 '이집션스(Egyptians)' 또는 '집션스(Gyptians)'라고 불렸고, 여기서 오늘날의 '집시'라는 명칭이 생겨난 것이다.

유랑민족인 집시의 앞날은 결코 순탄하지 못했다. 15세기에 서유럽으로 처음 이주한 후 80년 만에 대부분의 국가에서 추방당했고, 단지 떠돌이라는 이유 때문에 온갖 자연재해와 질병의 원인으로 그 지역과 나라의 주민들로부터 핍박을 받아야만 했다. 히틀러의 나치정권하에서는 '가장 비독일적인 종족'으로 몰려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무려 40만 명이 잔인하게 학살당했다. 뿐만 아니라, 구 소련의 '철의 장막'하에서도, 불과 얼마전의 발칸반도 내전까지 광적인 민족주의자들에게 집시는 '반드시 청소해야할 대상'으로 찍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최근에는 유럽 각 나라에서 집시에 대한 지위와 생활환경이 개선되고 있지만, 오랜 세월동안 이민족으로부터 당하면서 생겨난 집시민족의 배타성을 그리 쉽게 변하진 않을 것 같다.

 

천민 집시의 음악 '플라맹코(Flamenco)

'집시민족의 예술적 재능은 대단히 뛰어나다.

이들은 거쳐온 지역마다 자신들의 흔적을 남겨 놓았는데, 스페인의 플라맹코 음악 역시, 집시의 향기가 가득 배어있는 음악이다. 플라멩꼬에는 집시의 절망과 기쁨이 교차한다.

유랑민족의 설움과 세계 여러 곳을 떠돌며 느끼는 신선함과 즐거움이 공존하는 것이다.

여기에 과거 스페인을 약 8백 여 년간 지배했던 무어인(아랍 혼혈인종)의 영향으로 다분히 아랍적인 체취가 묻어난다.

우리가 플라맹코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특유의 '꺽이는 창법'이 대표적인 그것이다.

애끓는 꺾임 창법으로 부르는 플라맹코는 집시의 고된 역사를 표현하는 데 있어 더할 나위 없이 드라마틱하다.

그러나, 플라맹코가 처음으로 인정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플라맹코는 축구, 투우와 함께 오늘날 우리가 스페인하면 떠올리는 것 중 하나이지만, 20세기 초반까지 천민의 음악이란 이유로 스페인 내에서도 천대받던 음악이다.

스페인 남부 최하층 안달루시아 지방의 천민인 집시의 음악을 그리 쉽게 인정할 리 만무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예술성을 인정받고 세계무대로 진출을 한 집단도 있다

 

 

 

짚시동네에서 밤의 알함브라 궁전을 내려다보며 추위에 떨고 있는데

으슥한 골목 계단에 앉아 모포를 둘러쓰고 있던 짚시사내가 키득키득 웃으면서

날보고 손짓을 하며 모포속으로 들어 오란다.

그런데 진지하지 못하고 왠 웃음이 그리 헤프게 많은지...

나는 'NO, Thank you.'를 연발하며 호의를 거절하고 짚시동네를 내려가기로 했다.

그런데 짚시의 집, 가로등이 있는 창문 아래, 음악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만가만 그쪽으로 걸어갔다.

역시 타고난 그들만이 낼 수 있는 소리였다.

내 가슴은 이미 요동을 치며, 나 또한 짚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끝내 모포를 쓰고있던 짚시사내가 주는 담배를 피우고 그와 함께 모포를 뒤집어쓰고 술을 마셨다.

스페인의 와인은 50도가 넘는것이 있다.

그 와인 한 병을 다 마셨다. 그리고 내려오는데 휘청하며 다리가 풀리더니 어지럽다.

나는 순간 머리를 감싸쥐고 벽에 기대섰다. 짚시사내가 나를 부축하더니 괜찮냐?고 묻는다.

나는 잠시 어지러웠을 뿐이라며 괜찮다고 손사례를 치며 말했더니 괜찮아보이질 않는다면서 계속 괜찮겠느냐?고 묻는다.
한참을 벽에 기대서서 안정을 취한 다음에 짚시의 산을 내려 올 수 있었다

 

 

 

[Mars Lasar]Gypsy Leg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