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히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 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 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오래전, 모기업의 홍보실에서 사보 편집장을 지낼때의 일이다.
첫장을 넘기면서 표2에 시를 넣는 편집형식으로 매달마다 좋은 시 한 편씩을 실었었다.
마침 12월호를 제작하고 있었는데 팀원중에 알아주는 대학교 국문과를 나온 여직원이 시를 하나 가지고와서 건네 주고갔다.
읽어보니 이내 가슴이 뭉클하면서 머릿속에는 마치 영화의 한 씬처럼 자연스럽게 그림이 떠올랐다.
그후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를 보면 나의 뇌리 속에는 스쳐 지나가는 간이역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곤 한다.
젊은시절 출장을 다니며, 혹은 타고난 역마살을 숨길 수없어 방랑벽으로 이어지며 수없이 많은 밤열차를 타고 이동했던 기억들.
대합실 내의 톱밥난로는 지금의 세대들에겐 흑백영화같은 구물일지 몰라도 전혀 나에겐 어색하지 않다.
시대적 아픔을 서정적으로 그려냈다고 평가되는 곽재구 시인의 데뷔작 '사평역에서'(1981)를 읽을 때마다 나는 울컥한다.
아름다우면서 서럽고, 힘들지만 따뜻했던 그때 그 시절의 풍경을 소중한 흑백사진처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에는 지난 시절의 희망과 절망이 눈보라로 흩날리고 있다. 모래처럼 톱밥처럼...
시인이 이십대에 쓴 시답게 감각과 묘사가 사뭇 풋풋하다.
깜깜한 유리창에 쌓였다 녹는 눈송이들은 흰 보라 수수꽃(라일락꽃)빛이고
사람들이 그믐처럼 졸고 있다는 표현은 참으로 절묘하다.
확 타올랐다 사그라지는 난로 속 불빛은 톱밥을 던져 넣는 청색의 손바닥과 대조를 이루고 간헐적으로 내뱉는 기침 소리는 '눈꽃의 화음'을 강조하고, 뿌옇게 피어올랐다 사라지는 담배 연기는 회억(回憶)처럼 떠올랐다 가라앉곤 한다.
한줌의 톱밥을 던지는 '나'는 무슨 사연을 간직한 걸까? 기다리는 막차는 과연 올까?
모든 역들은 어디론가 흘러가기 위한 스쳐지나감이고 경계이다. 하여 모든 역들이 고향을 꿈꾸는 것이리라.
사평은 나주 근처에 있는 조그만 마을이라 한다. 그 사평에 사평역이 없다니... 그토록 울컥하게 했던 사평역이 어디에도 없다니...
그래서 더욱 나를 울컥하게 하는 것이겠지만.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는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시인의 절친한 친구인 소설가 임철우는 이 시에서 영감을 얻어 1983년 '민족과문학'에 소설 '사평역'을 발표하기도 했다. 신춘문예 당선작들이 이렇게 두고두고 기억되거나 애송되는 경우가 드문데 이 시 만큼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다. 이 시를 접하는 독자들은 우선 '사평역'을 떠올리고 그리워하며 그곳을 찾아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화순읍에서 고흥 방면으로 가는 국도 제15호선을 따라 15km를 가면 사평리에 이르는데, 정확히는 광주광역시와 인접한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에 소재하고 있으며, 이곳에는 기차역이 없다. 그러니까 '사평역'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공간으로서 3등 완행열차가 바쁠 것도 없이 쉬엄쉬엄 쉬어가는 80년대 전형적인 시골 간이역이다.
이 시를 쓴 곽재구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시 사평역에서,의 원래 모델은 남광주역입니다
시에 나타난 풍경들도 남광주역의 풍경이지요
시를 다 쓰고 나서 제목을 붙이는데 남광주역이라고 붙일 경우 너무 사실적이어서
환기력이 약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적절한 역이름을 찾아야했는데 그때 찾은 이름이 사평이었습니다
사평이라는 지명은 강이 있고 모래가 좋은 곳에 붙이는 지명인데
우리나라에 이 지명이 꽤 많이 있습니다
평사리 또한 사평과 같은 내력을 지닌 지명이라 할 수 있지요
가장 한국적인 냄새가 나면서도 시적인 여운이 있는 지명, 그러면서도 기차역이 없는 역명을 찾다보니
사평역이라는 이름을 찾게 되었지요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 두루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곽재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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