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 가던길을 멈추고 뒤돌아 보았다
노을이 휘장처럼 드리운 아름다운 궁전.
다시는 볼 수 없겠구나!
감상에 젖는 순간
솟구치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왕은 명하였다
어린 사이프러스 몇 그루를 구해오너라
병사들이 어린 나무들을 가져오자
길가에 심도록 명하였다
이는 우리들의 혼이니라
우리가 떠난 후에도
우리의 혼은 연연히 살아있을 것이다
왕이 말하자
신하들과 왕자. 공주, 비빈,
노예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그 눈물과 탄식 사이프러스 나무에 스며들었다
왕은 아프리카로 떠났다
초생달이 떠오르자 구름에 가리워졌다
수백년이 지나 한 나그네가
사이프러스 나무 아래로 왔다
나무 아래 섰는데 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초생달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오
만월이 되었다가 하현이 되었다가
모양만 바뀌는 것 뿐이라오
* 알함브라를 내려오며 - 권재효
* 1492년 무슬림 왕국 그라나다는 스페인 이사벨여왕에게 항복하고 아프리카로 떠났다.
초생달은 무슬림의 상징이다.
이사벨여왕은 그라나다를 점령후,
이슬람이 떠난 아름다운 알함브라 궁전을 보며 그대로 보전토록 명하였다 한다.
알함브라 궁전 주변에는 사이프러스 나무가 많다.
권재효시인은 알함브라 궁전을 보고 내려오는 길에
그냥 지나치기 쉬운 사이프러스 나무 한 그루까지 심중에 담으며 내려왔나보다.
수백년이 지나 다시 찾아간 나그네는 바로 권재효시인 자신일 수도 있고 <나>, 일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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