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애송詩

사하라 포구 - 권재효

Chris Yoon 2021. 10. 14. 12:28

 

 

1.

겨울 포구에는/ 하늘이 나즈막하게 닫혀있어/ 갈매기가 높이 날지 못 했다//

방파제 끄트머리/ 바다로 향해 서있던/ 소녀의 두 눈은 젖어 있었을까?

- 「사하리 포구 1 - 방울소리」에서

 

 

2.

사하리 포구에 가면/ 지금도 그 가시내 방파제 끝에서/

긴 머리 폴폴 날리고 있겠다// ...<중략>// 바다엔 황홀한

집어등 불빛/ 은갈치 떼 몰려오는데/ 설움도 포개면 기쁨이

되는가/ 그 밤사 파도소리도 희열로 끓더라니

- 「사하리 포구 2 - 은갈치떼」에서

 

3.

가시내랑 살림을 차릴 걸 그랬다/ 청운의 꿈은 애당초

내 것 아니기에/ 이름 없는 포구에서/ 갈치나 낚으며

살 걸 그랬다 <중략>// 동서남북 헤매어도 남는 건

바람뿐이던 걸. 모질고 모진 가시내 그렇게 목숨 버릴 줄이야..../

내 가슴에 못을 박아버린, 시방도 상처에 피가 흐르는 평생의 형벌

- 「사하리 포구 3 - 바람」에서

 

4.

간고등어처럼/ 외로움에 푹 절여진 가시내/ 그 애가 만들어

내는 우울의 심연/ 스믈스믈 안개로 피어오르다가/ 나를 가두어

버린다/ 허우적거리다 빠져 나오면/ 구슬픈 파도소리가 또

엄습해 왔다/ 서서히 난 미쳐가고 있었다/ 탈출에 대한 모의가/

수면 아래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 「사하리 포구 4 - 심연」전문

 

5.

가시내는 언제 다시 만날 수 있느냐고/ 손을 잡으며 물었지만/

안개는 아무런 대답도 않고/ 한 번쯤 포옹이 있었겠지/ 이젠

안개 속으로 사라질 순서/ 가시내가 한참 동안 서 있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서부영화 속 떠돌이 사내들처럼/ 나 역시

뒤돌아보지 않기로 했지

- 「사하리 포구 5 - 안개」에서

 

 

6.

붉은 정열 온전히 간직한 채/ 툭!/ 떨어지는 마음/

당신은 알까 몰라// 어여쁜 모습만 기억하소서

- 「사하리 포구 6 - 동백꽃」전문

 

 

7.

어느 날/ 바람이 지나가는 말로 전해주었다/ 가시내는 파랑새가

되어 멀리 날아갔노라고/ 남도의 동백꽃이 툭, 툭, 툭,/

연달아 지고 있었다// 그녀가 남긴 유물 중에는/ 그 아침 포구를

떠난 이에게 쓴/ 부치지 못한 편지도 여럿 있었다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 편지를/ 가시내와 함께 묻어주었다고 한다

- 「사하리 포구 7 - 파랑새」에서

 

 

8.

이제와 내가 시를 쓰며 통곡한들/ 무슨 소용 있으리/

원컨대 하느님/ 내가 커 가는 나무이게 하소서/

작은 가지에 파랑새 한 마리 깃들어 살게 하소서

- 「사하리 포구 8 - 나무」에서

 

 

 

윗 글들은 권재효시인의 두번째 시집 <나는 우울을 즐긴다>에서 3부 '사하라 포구'연작들로 사하라 포구에 살던 한 여인을 사랑했던 그의 가슴에서 지워진 적이 없는 젊은 날의 화인[火印]처럼 남아 있는 시인의 자서전같은 詩들이다.

미완의 사랑, 그것도 사랑했던 여인의 죽음으로 마침표를 찍어야 했던 사연이기에 읽는이로 하여금 더욱 마음이 아리고 쓰리게 한다.

누구에게나 한번쯤 있었을법한 젊은날의 사랑.

그 아팠던 상처투성이의 추억들을 이제는 나이가 들어 옛이야기를 들려주듯 담담하게 써내려간 싯귀들이 사뭇 드라마틱하다

 

나는 이 詩들을 읽어내리며 문득 얼마전에 들었던 음악, exey Kovalenko & Elena Galitsina - Sea Breez떠올렸다

먼 곳 어느 바닷가에서 들려오는듯한 음악.

멀면 멀수록 더 또렷해지는 마법같은 음악.

간간이 파도소리도 들려오고 눈을 감고 들으면 먼 이국나라가 떠오르는 음악

그래서 올 여름 바닷가에 나가면 듣고싶은 음악.

그러나 젊은날의 사랑을 떠올리며 이런 아련한 음악소리를 지워내야 할 날은 언제일까?

 

 

 

 

 

 

 

 

Alexey Kovalenko & Elena Galitsina Early Summer Morning (2015)

 

 

2. Sea Bree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