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애송詩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고정희

Chris Yoon 2021. 10. 14. 12:14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고정희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목을 길게 뽑고

두 눈을 깊게 뜨고

저 가슴 밑바닥에 고여있는 저음으로

첼로를 켜며

비장한 밤의 첼로를 켜며

두 팔 가득 넘치는 외로움 너머로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러질때까지

어두운 들과 산굽이 떠돌며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달력 속에서 뚝, 뚝,

꽃잎 떨어지는 날이면

바람은 너의 숨결을 몰고와

측백의 어린 가지를 키웠다

 

그만큼 어디선가 희망이 자라오르고

무심히 저무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

나는 너에게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수없이 나날이 셔터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꿈의 현상소에 당도했을때

오오 그러나 너는

그 어느 곳에서도 부재중이었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바람으로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1975년『현대시학』에 「연가」, 「부활 그 이후」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고정희는

타계하는 해인 1991년까지 모두 열 권의 시집을 상재한 시인이다.

첫 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 이후 『실락원 기행』(1981), 『초혼제』(1983), 『지리산의 봄』(1987), 『저 무덤에 푸른 잔디』(1989), 『아름다운 사람 하나』(1990) 등으로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창작 여정을 보여주었다.

그는 시를 통해 어떤 가혹한 억압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의지와 생명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형상화하였다.

1991년 6월9일. 장마속에서 자신의 시의 모체가 되어온 지리산 등반 도중 실족으로 피아골의 급류에 휩싸여 43살의 짧은 생애를 마감하였다.

유고 시집으로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1992)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