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3. 23.
치자꽃 설화 박규리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문 하나만 열어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엷은 가랑비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번도 사랑 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는 사람이 있다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도, 이루어 지지 않는것도 다 고통인 사랑이 있다
그래서 만나도 아프고 헤어져도 못이 박히는 사랑.
이승에서는 끝내 인연이 맺어질수 없을 것 같은 사랑이 있다
그걸 알면서도 솟는 눈물, 그걸 견디느라 아픈 목탁소리가 들리는 산사에
치자곷은 피고 가랑비는 엷게 떨어진다
그러나 그런 업연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보다 더 쓸쓸하고 가난한 사람이 있다
'한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 한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다
이별의 아푸고 슬픈 물줄기에 떠내려가는 사람들을 숨어서 지켜보며
그들보다 더 자신이 버림받은 것처럼 느껴지곤 하는 한 사람.
그 누구를 사랑한 적도, 사랑받은 적도 없는 사람.
박규리 시인의 '치자꽃 설화'는 젊은 시절, 심야 라디오 프로에서 한번 듣고 이내 詩集을 구입해서 읽었던 詩다.
이미 많은 이들이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베스트셀러이다.
산중 암자의 한 일화를 그대로 옮겼을 것만 같은 이 詩는 매우 산문적이면서도 절묘하게 詩的 울림을 증폭시킨다.
종교적 관습 혹은 그 가식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막상 절에 들어서면 엄숙해 지기 마련인데 스님을 이렇게 표현해도 되나?... 할 정도로 변모시켜 놓았다. 허기사 스님도 수행자 이전에 피끓는 젊은이 었거늘.
詩 속에 등장하는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도 비로소 인간답고,
실연에 겨워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는 여인도 비로소 사랑을 아는 여인다우며,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아 있는
話者인 시인도 절집에서 만난 보살답다.
그리 길지 않은 이 詩는 ‘설화’가 아니라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한편의 드라마다.
아니, 허구의 드라마가 아니라 감동적인 다큐멘터리가 아닐런지...벌써 몇번째 이 詩를 포스팅하지만 할적마다 감동이 일고 눈시울이 더워진다
어느 지인은 이 詩가 오르면 그날은 문을 잠궈놓고 하루종일 가슴으로 운다고 했다
그렇다.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이다그리고 그 사랑을 정리하는 일은 더 어려운 일이다
박규리 시인은 1960년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정을 수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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