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애송詩

늦가을...

Chris Yoon 2021. 10. 12. 07:13

2013. 11. 18.

 

 

 

가을          한용국
- 부재시편 6



그때 장엄하던 구름의 행렬이 창밖이었던가
어디서든 술과 과일은 끝없이 배달되었고
성욕은 알맞은 거리에서 자동 삭제되었으니
자주 불어터지던 사발면 위로
곰팡이보다 먼저 복사꽃 피어오르던
수천번의 엔터로도 열리지 않았을
우리들의 신전
저마다 슬픔의 칼을 들고
서로의 발바닥에 그림자 문양을 새기며
무엇이든 숭배하였고 그만큼의 힘으로
무엇이든 저주하였으므로
금단의 열매를 천정 높은 곳에 달아두고
누워서 빈둥거리며 뒹굴거렸던
등짝을 휘갈기며 찬란하게 웃어제꼇던
그때, 아무도 멸종을 두려워 하지않았던 가을이었다.

 

 

 

 

가을 편지          정숙진

 

 

가을이 아직 다 가지 않았는데

낙엽 따라 날아온 송년 소식이

초대장에 담겨 내 곁에 앉아 있네

가을인가 했더니 어느새 겨울로 가려는 길목에

채 하지 못한 일과보지 못한 그리운 님 아직인데

우수수 떨어져 그냥 가려 하네

일상 속에 고여 오는 그리움

그저 상상화를 그리며

고이 접어 책갈피에 넣어 둔 단풍잎에

담아두고 보고 싶을 때 마다 살짝 열어 보니

혹여 그대가 가을 편지 보내올까

마음은 문 밖을 서성이네

 

 

 

 

첫 눈 내린날         윤필립

 

 

첫눈이 내린다

걷잡을 수 없는 내마음처럼

어지럽게 회오리치며 하늘가득 떠다니는 눈송이들

흡사 길을 찾지 못하는 나비떼들같다

한때 저 먹구름 속에서 눈송이 쏟아지듯

걷잡을 수 없는 날들 있었지

그런날, 늦가을은 짧기만 했어

지금 나는 삭정이 같은 추억이라도 한순간
독하게 끌어안아보는 것이다

그래, 추억마저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그 추억 더듬으라고 오늘 서울에는 첫눈이 내렸다

 

사진 / Chris Nicolas (역삼역 파이넨스 빌딩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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