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애송詩

가물거리는 그 흰빛 - 이근일

Chris Yoon 2021. 10. 10. 06:14

2012. 8. 31.

 

 

가물거리는 그 흰빛          이근일



병원 침대에 눕자마자 내 얼굴 위로 흰빛이 쏟아진다

심전도기계 위로 드르륵 종이가 말려 올라오는 동안
나는 내 양 옆구리에서 길게 돋아난 핑크빛 지느러미를 보았다
잠시 심해 속을 유영하는 나를 떠올렸던가,
불현듯 내 안에서 고래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과거의 어느 시간을 품은, 심장 속
그 한 방울의 피로부터
누군가를 부르는 간곡한 울음소리가

전생에 나는 분홍고래가 아니었을까

일생 동안 깊은 바닷속을 누비며
이를테면 암초 위에 착생하는 산호;
그가 살면서 촉수에 머금는 독에 대해서라거나,
사랑에게 버려진 채 그 독 속에 숨어 지내는 어떤 神의 아픔에 대하여
슬픈 빛깔의 온몸으로 노래하던, 그때도
너는 내 안에 가득 고인 어둠이 두려워 기어이 나를 배반했을 것인가,
울음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이는 사이 내 감은 눈 속으로
캄캄한 바닷물이 밀려들어오고

바닷속 나는 흰빛을 따라가고 있었다

저만치 그 흰빛은 너의 얼굴을 닮고,
또 네 고운 목소리를 닮은 듯했다
그러나 내가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너의 얼굴을 조금씩 뭉개고 지우던 흰 빛,
침묵하며 멀리멀리 달아나던 그 흰빛,
나는 지쳐서 점점 해저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때 간호사가 다가오고 심전도기계가 작동을 뚝 멈췄다

순식간에 내 눈꺼풀 밖으로 바닷물이 다 빠져나갔지만,
나는 한동안 그대로 누운 채 맥없이 파닥거렸다,
침대였던가 뻘이었던가, 가물거리는 그 흰 빛 속에서.

-《현대문학》2006년 6월호 신인 당선작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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