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zart와 Requiem
빈이 음악의 도시가 된데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역할이 가장 컸다.
빈 출신이거나 빈에서 활동한 위대한 음악가인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을 비롯해서 슈베르트와 브루크너, 요한 스트라우스 2세, 브람스, 말러에 이르기까지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원이 있었다.
빈을 상징하는 최고의 음악가는 단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이다.
1756년 오스트리아의 서쪽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모차르트는 대성당 부악장이자 궁정 전속 작곡가였던 아버지 레오폴트에게서 5살 때 처음 피아노를 배운 후 6살 때부터 작곡을 시작했다.
모차르트가 빈에 본격적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25세 때인 1781년이지만 훨씬 이전인 1762년 빈에서의 첫 흔적이 나타난다.
모차르트는 6살이던 1762년 누나 마리아 안나와 함께 빈의 쇤부른 궁전에 초대받는다.
모차르트가 천재라는 소문을 들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로부터 초청을 받은 것이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모차르트 남매를 불러 피아노 연주를 들은 곳은 쇤부른 궁전에서도
그녀가 가장 사랑하던 공간인 ‘거울의 방(Spiegelsaal)’이었다.
현명하고 강인하면서도 따듯한 계몽군주였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16명에 이르는 자녀들을 이용해
유럽 각국과 결혼정책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고 힘을 늘렸지만, 한편으로는 가족에 대한 사랑이 깊었다.
그래서 쇤부른 궁전 ‘거울의 방’에서 자녀들과 함께 놀거나 연주회를 감상하는 것을 즐겼다.
그날도 잘츠부르크에서 온 6살 꼬마 모차르트의 신기에 가까운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서 감탄하고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연주를 마친 모차르트를 자신의 무릎에 앉히면서 소원을 말하면 들어주겠노라고 했다.
그 때 모차르트의 눈에는 한 떨기 에델바이스처럼 작고 예쁜 소녀가 보였다.
그리고는 여제에게 그 소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여제를 비롯해 그 자리에 있던 공주들과 오스트리아의 대신들은 포복절도를 했다.
모차르트가 결혼을 하고 싶다고 말한 소녀는 여제의 15번째 자녀인 마리아 안토니아 공주였다.
모차르트와 그 공주의 인연이 그 이후에도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모차르트가 프랑스 파리에 잠시 머물던 1777년 마리아 안토니아 공주도 파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은 더 이상 마리아 안토니아가 아닌 마리 앙투아네트였고,
프랑스의 왕 루이 16세의 왕비였다. 그리고 12년이 더 지난 후인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고,
다시 4년 후인 1793년 10월 16일 비운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다행일까?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던 모차르트는 2년 앞서 세상을 떠나 첫사랑의 비참한 죽음을
알지 못했다.
빈에서 모차르트의 흔적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다.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출신이지만 25살이 되던 1781년 빈으로 이주한 후 죽을 때까지 빈에서 살았다.
빈에 정착한 다음 해에 콘스탄체를 만나 결혼한 모차르트는 10여 년 동안 무려 13번의 이사를 하면서
살았지만 그중 가장 오래 살았던 곳에서 유명한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작곡했다.
지금은 모차르트 기념관으로 꾸며져 ‘피가로 하우스’라고 불린다.
그 무렵 모차르트는 콘스탄체와의 사이에서 6명의 자녀를 두면서 적잖은 돈도 벌었다.
그러나 부부의 씀씀이가 너무 헤펐다. 돈이 떨어져도 천재에게 곡을 부탁하는 사람이 많았고,
사가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그들은 돈이 아쉽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흥청망청 돈을 쓰던 모차르트 부부는 1790년이 지나면서 극도로 궁핍해지기 시작했다.
1791년 모차르트는 프란츠 폰 발젝 백작으로부터 장례미사에 쓸 미사곡을 의뢰받았다.
그 해 2월에 죽은 부인을 기리기 위해 의뢰한 것으로 파격적인 돈을 제안했다.
모차르트는 그 곡을 쓰는데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았고, 결국 모차르트는
<레퀴엠>을 완성하지 못했다. 11월 하순에 앓아누운 모차르트는 <레퀴엠> 중에서도 가장 애통한
감정이 끓어오르는 ‘라크리모사’(Lacrimosa, 눈물의 날)의 작곡을 8마디에서 중단한 채 1월 5일 영원히 숨을 거뒀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천재가 죽은 것이다.
그때까지 모차르트가 쓰고 있던 그 장례미사곡, ‘레퀴엠’은 백작 부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만들던 곡이
결국 자신의 장송곡이 된 셈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모차르트가 직접 작곡한 부분을 잠시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가장 앞에 등장하는 ‘인트로이투스’(Introitus, 입당송)는 모차르트가 전부 작곡했다.
‘주여,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라는 가사로 시작하는데,
<레퀴엠> 중에서도 가장 압권으로 손꼽히는 명장면이다.
그 첫머리의 가사가 이 음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영원한 안식’이다.
이어서 모차르트는 2곡 ‘키리에’(Kyrie, 불쌍히 여기소서)부터 3곡 ‘세쿠엔치아’(Sequentia, 연속된 노래들),
4곡 ‘오페르토리움’(Offertorium, 봉헌송)을 부분적으로 작곡했다.
노래 성부와 베이스, 그리고 관현악 파트의 일부를 직접 작곡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듣는
<레퀴엠>의 절반가량을 작곡하고 눈을 감은 셈이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자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가 다급해졌다. 선수금은 이미 받아 쓴 상태였고,
나머지 부분을 마저 작곡해야 의뢰자로부터 잔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콘스탄체의 부탁을 받고 마무리 작업을 최종적으로 해낸 이가 바로 모차르트의 제자였던
쥐스마이어(1766~1803)이다.
그는 모차르트가 남긴 미완의 악보에 오케스트레이션을 보충했고, ‘라크리모사’의 9마디부터,
5곡 ‘상투스’(Sanctus, 거룩하시도다)와 6곡 ‘베네딕투스’(Benedictus, 주에 축복 있으라),
7곡 ‘아뉴스 데이’(Agnus Dei, 하느님의 어린 양)를 추가로 작곡했다.
빈은 천재의 죽음에 냉랭했다.
모차르트의 장례식은 그가 콘스탄체와 결혼식을 올렸던 성 슈테판 성당 한 켠에서 초라하게 치러졌다.
생애 가장 아름다운 순간인 결혼식이 열렸던 곳에서의 장례식이라니...차라리 천재의 명성에 걸맞는 화려한 장례식이었다면 의미가 남달랐겠지만, 그의 장례식은 참으로 초라한 장례였다.
친구 열 명과 가족 여섯 명이 전부였다고 한다.
아내인 콘스탄체는 아파서 누워 있었다는 얘기도 있고 임신 중이었다는 설도 있다.
설상가상으로 날씨마저 나뻐서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쳤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모차르트의 묘지가 어딘지를 확인할 수 없는 비극이 시작된다.
날씨가 웬만했으면 그날의 문상객들은 시신을 실은 마차를 뒤따랐을텐데 눈보라가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에 마부가 급하게 마차를 몰았다고 전해진다.
결국 친구들은 운구 마차를 뒤따라가는 일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에게 열광했던 합스부르크의 왕족도, 빈의 귀족들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게다가 아내인 콘스탄체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과오를 저지른다.
장례가 끝난 뒤에라도 남편이 어디에 묻혔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당연지사였을 텐데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야 두번째 남편인 게오르크 니콜라우스 폰 니센(Georg Nikolaus von Nissen)과무덤 위치를 확인하려 했지만 때가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다.
모차르트의 시신을 매장했던 인부가 세상을 떠난뒤였던 것이다.
콘스탄체는 1809년에 재혼했으니, 적어도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20년이 거의 흘렀을 무렵이다.
게다가 뒤늦게 무덤을 확인하려고 했던 이유도 아리송하기만 하다.
그녀의 두번째 남편은 덴마크의 외교관이었는데, 모차르트에 관한 자료를 모으던 수집가였다.
훗날 모차르트의 편지들을 토대로 평전을 쓰기도 했는데 그 실패한 무덤 찾기도 전 남편에 대한 연민 때문이아니라 자료수집 이유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많은 여행객들이 빈 3구의 성 마르크스 묘지, 모차르트가 누워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비좁고 가난한공동묘지를 찾아가지만, 어디가 과연 모차르트의 무덤 자리인지는 도무지 확인할 길이 없다.
불행은 그치지 않았다. 성 슈테판 성당에서 초라한 장례식을 마친 모차르트의 관은 마차에 실려 약 5km 떨어진 외곽의 성 마르크스 묘지로 향했다.
콘스탄체 등 유족들은 묘지의 정문에서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다.
모차르트의 시신은 다른 이름 모를 시신들과 함께 한 구덩이에 묻혔다.
콘스탄체와 가족들은 그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한참의 세월이 지난 후 모차르트가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 그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다.
모차르트가 죽고 103년이 지난 1894년 빈 시당국은 시내에서 동남쪽 한적한 곳에 대규모 묘지인 시립 중앙묘지를 형성했다.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명인들의 묘지를 한 곳에 모은 것인데, 베토벤, 슈베르트, 브루크너, 요한 스트라우스 부자, 브람스 등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거나 활동한 위대한 음악가들의 묘지를 따로 모아놓았다. 그리고 비록 시신도 없는 기념비지만 모차르트도 이곳에 함께 했다.
그의 죽음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빈 시민들은 그가 죽고 100년이 넘어서야 그를 그리워했고, 또 그를 열심히 팔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빈의 모자르트 하우스, 시립 중앙 묘지도 관광코스에 들어가 있다
'- 東 Europ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로니에(Maronie)핀 창가에 앉아 호이리게(Heuriger) 정식을 (0) | 2021.10.20 |
---|---|
A Souvenir, Wien - Austria (0) | 2021.10.20 |
St. Stephen's Cathedral(聖슈테판 성당)에서 들은 Ave verum corpus (0) | 2021.10.20 |
聖 슈테판 대성당(St. Stephen's Cathedral) (0) | 2021.10.20 |
벨베데레 궁전(Oberes)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 (0) | 2021.1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