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가 가난과 병마와 싸우며 그의 짧은 일생동안 작업한 그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그의 그림은 약 30점의 여성 누드화 대작들(1916~19)과 4점의 풍경화(1919)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친척·화가·작가·음악가·배우·미술상 및 미술품 수집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초상화들이다.
누워있는 裸婦(Nu couche)
* 모딜리아니 ‘누워있는 나부’ 1972억원 낙찰
세월이 흐른 2015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1884~1920)의 회화 <누워있는 나부>(Nu couche)가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7040만 달러(약 1972억원·수수료 포함 가격)에 낙찰이 되었다.
전세계 미술품 경매 사상 역대 2위에 해당하는 높은 가격이었다.
살아생전 모딜리아니는 초상화를 주로 그렸고, 그가 그린 나부상은 모두 35점 가량 되는데 평생을 가난 속에서 지낸 그는 1917년 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파리에서 나부상들을 포함해 개인전을 열었었다.
전시 당일 풍기문란을 이유로 모딜리아니와 화랑 주인은 경찰에 체포되었다. 나부상 다섯점은 압수됐고, 전시회는 그대로 문을 닫았었다.
사후 95년 뒤인 이날 경매로 모딜리아니는 전세계 미술품 경매에서 작품이 1억달러 이상에 거래된 예술가들의 목록인 ‘1억 달러 클럽’에 이름을 올리게 된것이다. 모딜리아니의 작품 중에서는 뉴욕에서 7천만달러(약 810억원)에 팔려나간 1911~1912년작 조각 ‘두상’을 뛰어넘은 최고가다.
모딜리아니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는 ‘누워있는 나부’는 그가 1917~1918년께 캔버스에 그린 유화로, 붉은 색 소파 위 파란색 쿠션에 누워있는 나체의 여인을 담은것이다.
당시로선 대담한 작품이었던 탓에 프랑스 파리에 처음 전시됐을 때부터 거센 논란이 일었고, 군중이 이 작품을 보기 위해 창밖에 몰려든 탓에 경찰이 전시 폐쇄를 명령내린 작품이다.
나는 이 작품, <누워있는 나부>(Nu couche)을 처음 1970년대 초에 보았다.
미술대학에 입학을 하고 대학생 신분으로 대학도서관을 이용하면서 유럽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다가 시선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이건 완전히 춘화도였다.
미술대학을 가기위해, 아니 서울예고 미술과를 일찍부터 가기위해 혜화동의 미술학원에 다닌적이 있다.
그때 대학입시하는 상급생들을 상대로 누드 뎃상시간이 있었는데 나는 그 시간을 함께 들어가 일찍부터 자연스레 누드에 눈을 떴었다.
그런데 <누워있는 나부>는 좀 달랐다. 나보란듯이 네 활개를 벌리고 오히려 젖가슴과 음부를 더 내어민듯 강조시킨 것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묘하게도 에로티시즘을 자극시키는 그림이었다.
그 후 나는 대학도서관을 자주 드나들며 그 그림을 찾아 수음을 하는 기분으로 혼자 즐기다 나왔었다.
초상화 (Portrait)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굶주리고 외로운 유랑기를 2년 동안 보내면서 그는 자신 속에 잠재하는 영상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피카소의 변모를 싫어했고 미래파의 권유를 뿌리치면서 그는 자신의 독자성만을 모색하고 있었다. 1907년 살롱 도똔느 에서 개최된 세잔의 대회고전은 그에게 큰 감명을 준다. 이 첫 번째 공식 작품은 그 다음해인 1908년에 앙데팡당전에 출품하게 된다. 아직 모딜리니아의 유연한 데포르마 숑인 생(生)의 곡선(曲線)은 보이지 않지만, 그의 경직된 지적(知的)인 성찰(省察)로서의 주제 파악이 역력하다. 세잔과 표현주의의 영향으로 짐작된다.
모딜리아니의 결핵이 악화되자 즈보로우스키 부처는 무리를 해서 그를 남 프랑스의 니이스로 보낸다.
1918년의 일이었다. 지중해의 해맑은 요양지에서 오래만에 안정을 얻은 모딜리아니는 제작에만 몰입하게 된다.
가난한 시골의 농부와 소년 소녀들을 깊은 애정을 가지고 모딜리아니는 그려 나간다. 이 작품은 그 가운데의 하나이며, 소박하고 건강하며 사랑스러운 농부 아들의 모습이 밝게 그려져 있다. 이 밝음새는 당시의 모딜리아니의 삶의 건강성을 바로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겠다. 한편 이 화면에서 우리들은 세잔의 기법과 매우 유사한 터치를 발견하게 된다. 세잔을 존경했던 그는 남 프랑스의 적막한 전원 속에서 문득 엑상, 프로방스에서의 세잔의 농부의 그림을 회상했는지도 모른다.
시골의 가난한 사람들을 그렸음에도 그들을 동정하는 감정의 호소라는 측면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담담히 화폭에 담았다. 모딜리아니는 초상화의 주인공이 누구라는 것을 알려주는 요소들은 배제하여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인간’ 그 자체를 주인공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조용한 애정의 대상이 되는 모델들은 여기서의 작품처럼 일상적으로 대하는 생활 주변의 표정들이다. 비록 그들의 인생은 행복한 게 아닐는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인간성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이나 선량함의 강력한 증인들이라고 모딜리아니는 믿었던 모양이다. 이 작품은 그러한 모딜리아니의 마음씨를 나타내고 있으며, 선량함을 표지한다 하겠다.
20세기 초 과학기술의 발달로 사진이 등장하면서 모딜리아니처럼 오직 ‘인간’을 주제로 한 초상화만을 고집한 화가는 드물다. 변형되고 뒤틀린 야수파와 입체파가 미술의 대세로 떠올랐을 때조차 모딜리아니가 초상화에만 매달린 이유는 무엇일까. 1907년 모딜리아니가 남긴 메모는 그 이유를 짐작하게 해준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현실도 그렇다고 비현실도 아니다. 나는 무의식, 즉 인간의 본능이라는 신비를 알고 싶다” 이 말은 모딜리아니가 모델을 면밀히 관찰하여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탐구하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고유한 본성’, 즉 생명의 근원을 찾고자 한 것이다.
“당신의 영혼이 해부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고, 그 앞에서는 마음속 깊숙한 어떠한 감정도 숨길 수 없음에 당황하게 될 것이다” 모딜리아니와 잔 에뷔테른 부부의 결혼서약서에 증인으로 서명하기도 했던 루냐 체코프스카의 말로, 모딜리아니가 자신의 초상을 그릴 당시 모델로서 받은 인상을 남긴 말이다.
모딜리아니의 그림은 약 30점의 여성 누드화 대작들(1916~19)과 4점의 풍경화(1919)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친척·화가·작가·음악가·배우·미술상 및 미술품 수집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초상화들이다.
초상화의 모델이 된 콘스탄틴 브랑쿠시, 디에고 리베라, 앙리 로랑스, 파블로 피카소, 샤임 수틴, 후안 그리스, 막스 자코브, 장 콕토, 자크 립시츠 등을 보면 모딜리아니가 자주 드나들던 몽파르나스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몇몇 사람들, 예를 들면 폴 기욤, 한카 즈보로프스키, 레오폴트 즈보로프스키, 비어트리스 헤이스팅스, 잔 에뷔테른 등은 여러 번 그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자화상은 죽기 직전인 1919년에 그린 단 1점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모딜리아니의 남프랑스 풍경화들
인간만을 그려왔던 모딜리아니의 작품 중 이것은 매우 희귀한 예이다.
그는 풍경화를 미술의 장르가 아니라고까지 경원했으며, 자연은 미술가가 참여하는 곳이 못 된다고까지 극언했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결핵을 치유해 주는 요양지인 남 프랑스의 해맑은 대기는 얼마간 오만했던 그의 인간 본위를 누그러뜨렸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전생애를 통해 오직 4점의 풍경화만 그렸다.)
한눈에 세잔의 기법을 연상시켜 주는 이 작품은 이를 데 없이 간소한 풍경화이다.
해안으로 통하는 오솔길과 한 채의 집과 한 그루의 나무가 모두이다.
그러면서도 이 작품이 여느 정취를 불러일으키는 풍경임은 그의 인물처럼 그의 마음이 거기에 투영되었기에 그럴 것이다.
세잔느의 영향
모딜리아니의 전(全)작품은 언제나 한 인물의 초상화이고 한 화면에 두 인물이 등장하는 건 <립시즈 부처>의 작품말고는 이것이 나머지 예이다. 또한 그의 모티브는 항상 서민적인 애환이 조용하게 표정짓는 삶의 모습들인데, 여기서처럼 정장한 한 쌍의 부르조아가 등장하는 경우도 이것이 마지막 예이다. < 앞에 적은 조각상인 길쭉한 수직선과 견주어 보면 매우 흥미롭다. 당시의 그는 조각을 위한 에스키스를 무수히 제작하고 있었으며 거기서 두드러지던 징후는 입체파적인 조형 감각이었다.
화면을 좌우 대칭으로 구성한 다음 각기의 인물의 중앙선을 관통한 선상에서, 가령 남자의 오른쪽 뺨 위의 원형의 선과 여자의 그것이 대응한다는 게 여기서의 예이다. 따라서 이러한 선묘는 불필요한 색채의 텐션(tension)을 효과적으로 제약하고 있으며, 동시에 선맥의 제어를 자율적으로 살리고 있다.
첼리스트 (Study for The Cellist)는 한눈에 보아서 세잔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세잔의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의 왼쪽 인물을 그대로 모사한 듯한 착각마저 일게 한다. 다만 그려진 첼로가 화면의 아래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그것을 연주하는 인물의 내면의 깊이를 암유하는 듯도 싶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음조를 듣는다는 것인가. 역시 전기한 멜랑콜리의 읊음이며, 짙은 인간애의 색조라고 해야겠다.
이 작품의 뒷면엔 브랑쿠지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모딜리아니는 브랑쿠지로부터 조각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일깨웠으며, 그를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첼리스트의 면모가 뒷면에 그린 브랑쿠지(정면으로 된 크로키)의 옆 모습과 불가사의하게도 일치하고 있다.
미술은 문화적 유산이며, 세잔의 유산을 모딜리아니가 상속한다는 역사를 이 작품은 증명해 주고 있다.
모딜리아니의 전(全)작품은 언제나 한 인물의 초상화이고 한 화면에 두 인물이 등장하는 건 <립시즈 부처>의 작품말고는 이것이 나머지 예이다. 또한 그의 모티브는 항상 서민적인 애환이 조용하게 표정짓는 삶의 모습들인데, 여기서처럼 정장한 한 쌍의 부르조아가 등장하는 경우도 이것이 마지막 예이다. < 앞에 적은 조각상인 길쭉한 수직선과 견주어 보면 매우 흥미롭다. 당시의 그는 조각을 위한 에스키스를 무수히 제작하고 있었으며 거기서 두드러지던 징후는 입체파적인 조형 감각이었다.
화면을 좌우 대칭으로 구성한 다음 각기의 인물의 중앙선을 관통한 선상에서, 가령 남자의 오른쪽 뺨 위의 원형의 선과 여자의 그것이 대응한다는 게 여기서의 예이다. 따라서 이러한 선묘는 불필요한 색채의 텐션(tension)을 효과적으로 제약하고 있으며, 동시에 선맥의 제어를 자율적으로 살리고 있다.
모딜리아니의 조각
2014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7천 70만 달러에 낙찰된 모딜리아니의 <두상> 작품은 회화를 포함한 그의 모든 작품 중 가장 비싼 작품이다. 간결하면서도 예리한 형태 감각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모딜리아니가 1911년경 파리의 공사장에서 주워온 대리석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1909년 몽마르뜨에서 몽파르나스로 이사한 모딜리아니는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와 이웃이 되었고, 이를 계기로 몇 년간 조각 작업에 몰두하게 된다. 그가 남긴 서른 점 가량의 석조두상은 단순하고 잡아 늘린 듯 한 길쭉한 형태가 특징적이다.
그는 조각을 위한 에스키스(작품을 하기전에 만들어보는 작은 모형)를 무수히 제작하고 있었으며 거기서 두드러지던 징후는 입체파적인 조형 감각이었다.
빈곤함 속에서도 늘 세련된 스타일을 고수하던 모딜리아니는 '흙투성이가 되기 싫다'라고 말하며 흙 반죽 점토로 작업하지 않고 나무와 석재를 선호 했는데,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했던 모딜리아니가 조각할 나무를 구하기 위해 철로 버팀목을 훔치거나 석재를 구하기 위해 한밤중에 보도블럭을 들춰내기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러나 조각은 그의 병약한 체력으론 과중한 노동이었고, 재료비도 너무 비쌌다.
대신에 그는 조 각을 위한 밑그림으로 <카리아티드>연작을 남겼다.
결국 가난이 장애가 되어 값비싼 재료를 필요로 하는 조각활동은 더 이상 불가능 해졌고, 설상가상으로 작업 중 발생하는 먼지로 인해 건강이 더욱 악화되자 조각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모딜리아니의 조각 작품은 그가 박물관에서 접한 아프리카 미술의 영향과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던 시절 접했던 중세의 조각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모딜리아니가 남긴 원시적인 요소와 종교적인 아우라를 지닌, 특별한 존재감으로 우아함을 발산하는 조각 작품들은 그의 짧은 인생과 가난으로 계속 이어지지 못한 채 실험적으로만 끝난 그의 작품 활동에 대한 아쉬움을 남긴다.
대부분 사암으로 만든 그의 독창적인 조각은 모두 합해 25점에 이른다. 드로잉의 수는 확정할 수 없다.
모딜리아니는 조각을 하고 싶어 했다. 살아생전 조각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못했었다.
'그는 그저 어쩔 수 없어서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그가 진짜로 바라는 것은 돌로 조각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소원은 평생 그를 떠나지 않았다.'
훗날 '찰스 더글라스'는 술회했다.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1884~1920)
Amedeo Modigliani는 내가 젊은 시절에 무척이나 좋아했던 화가이자 조각가이다.
조각을 전공하던 시절, 그의 영향을 받아 많은 모작도 많이 만들어보고 은연중에 그의 작품성향까지 따라갔던 예술가다.
그리고 지금도 좋아하여 그의 작품전이 들어올때마다 시간을 내어 달려가 몇번이고 보고 나온다.
그러나 마땅치않은 면도 있다.
모딜리아니는 자기관리를 하지못한 의지없고 나약한 청년이었다.
잘 생긴 얼굴, 우수에 젖은 표정, 폐를 앓는 나이브한 매력을 지닌 청년은 파리 '몽마르트르의 라팽 아질'이나, '몽파르나스의 로톤드' 카페 창가에 앉아 뭇여성들의 관심에 올랐을것이다.
그러면서 연상의 여인과 동거를 했으며 마약과 술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자신의 생명을 단축시켰다.
그리고 끝내 14세 연하의 화가 지망생 '잔 에뷔테른(Jeanne Ebuterne)'을 만나 책임 질 수 없는 동거에 들어간후, 아이까지 둘이나 갖게하고 죽음으로 막을 내리며 가엾은 잔 에뷔테른까지 죽음에 이르게했다.
- Chris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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