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옥션>에서 주관하는 3월 경매 프리뷰가 지난 3월 6일부터 17일까지 열렸다.
경매일은 17일 이었고, 프리뷰 기간중에는 관람도 무료였다.
피카소, 천경자, 박수근, 김환기, 박서보, 이우환, 앤디워홀, 아오이 쿠사마 등 거장들의 작품들 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많은 작품들이 있었고, 그중 올 1월에 타계하신 물방울 시리즈로 유명한 김창렬 화백의 작품도 9점이나 경매에 나왔다.
그중 단 하나의 물방울을 그린 <물방울>은 8,200만원에 팔렸다.
김창렬 화백의 작품들은 올 1월에 그가 타계한 후에 열린 2월 서울 옥션에서도 최고가를 경신했다고 하는데,
이번 3월의 케이옥션에서도 9점 모두가 낙찰되었다. 낙찰 총액은 14억 6200만원이었다고 한다.
개중에선 이를두고 신통찮은 비슷비슷한 그림을 작가가 타계하고나니까 그림값이 치솟는다는 비난의 소리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김창렬화백의 물방울그림을 가지고 함부로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물방울그림은 김창렬화백의 시그니처이다.
그는 물방울 하나로 반평생을 보내며 멋진 작품을 탄생시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김창렬화백 자신의 말처럼 무(無)로 돌아갈 물방울, 곧 스러질 물방울을 영원 속에 남기는 작업을 30년간이나 해왔다.
그동안 김창렬 화백은 국내에서보다 외국에서 더 유명했다.
파리에서 물방울 작품으로 호평을 받아 그의 작품을 인정받았고
그 후 계속 파리에서 작품 활동을 해왔었다.
김창렬화백(1929. 12. 24. ~ 2021. 1. 8.)은 초기에는 추상화 위주였으나
1972년부터 물방울이라는 소재를 다루면서 '물방울 작가'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대중적인 인기와 함께 대한민국 내 해외 미술계에서도 미학적 논의와 관심을 불러 일으켜 한국 현대미술의 큰 획을 그었다. 그의 작품은 백남준, 이우환 등과 더불어 해외 유수의 미술관에 컬렉션 되어 있으며 더욱이 그가 활동하였던 프랑스에서 매우 중요한 작가로 기록되고 있다.
김창렬화백의 작품은 1961년 파리비엔날레, 65년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출품했고, 69년 파리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여한 이후 프랑스 파리에 정착했다.
1972년에는 전위미술 전시회인 살롱 드 메에 <밤의 행사>를 출품하여 유럽에서 데뷔하였으며,
대표작으로는 <기억> , <물방울의 자욱> , <해체> 등이 있다.
1972년 살롱 드 메(Salon de mai)에 출품한 검은 바탕의 화폭 한 가운데에 커다란 물방울 하나를 그려 넣은
<밤에 일어난 일>이 최초의 물방울 그림이다.
그런 그의 물방울 그림을 우리는 개인의 견해차이로 가격을 논해서는 안된다.
피카소의 스케취 한 장도 얼마인가?
또 미국의 경매시장에 나온 판화로 찍어낸 Pop Art만 해도 얼마인가?
그런데 김창렬화백의 그림이 이들만 못하고 그림값도 그들보다 아래를 맴돌아서야 될 말인가!
그림의 선택기준은 개인의 취향이다.
김창렬화백의 그림이 가격이 높게 측정되었다고 생각된다면 구매를 안하면 된다.
그리고 김창렬화백의 그림을 작은 것이라도 한 장 소장하고 싶다면 비싸다고 생각말고 전재산을 팔아서라도 구입하면 된다. 이것이 미술 애호가의 본질일 것이다.
유감이라면 좋은 그림을 우리는 왜 진작 몰라보고 작가가 타계하고 나서야 경매에서 최고가를 갱신시키는지,
좋은 그림은 세월이가도 변함없이 좋은 것이다.
작가가 평생을 생각하며 작업을한 깊이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일시적인 Pop Art와는 비교가 안된다.
김창렬 (1929. 12. 24. ~ 2021. 1. 8.)
김창열은 1929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서예에 조예가 깊은 할아버지와 함께 자라며 붓글씨를 통해 회화를 접했다.
해방의 혼란 속에서 그는 서울의 다양한 회화연구소를 접하게 되었다.
그림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검정 고시로 미술대학에 1948년 입학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일어난 6·25 전쟁으로 1950년 학업을 중단했다.
강제징용을 피해 월남하여 경찰학교에 지원하였고 1961년까지 경찰생활을 지속하였다.
경찰생활 중에서도 서울 경찰전문학교 도서주임으로 근무하면서 일본에서 들어오는 화집과 미술서적을 통해
당시 세계적 흐름이었던 앵포르멜 운동을 간접체험하였다.
그는 경찰생활을 그만두고 서울예고 교사로 근무하며 세계무대로 눈을 돌렸다.
1961년 제2회 파리 비엔날레,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출품하며 국제무대에 대한 꿈을 지속하다, 1966년 록펠러 재단의 초청을 받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러다 1969년 백남준의 도움으로 파리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여하고,
이를 계기로 뉴욕을 떠나 파리에 정착하게 된다.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며 20여년간 물방울만을 화폭에 담는 독특한 작품 세계를 이룩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개인전 다수 (한국 프랑스 독일外)
물방울이라는 평범한 소재를 그림으로 끌어들여 사물의 신비스런 아름다움에 눈뜨게 해 준 그의 그림은
세계유수한 미술 평론가들의 격찬을 받고있다
그의 물방울 그림은 우리 나라 고유의 한지나 천자문 문양의 바탕위에 그려져 있어, 동양적인 정서와 분위기를 한껏
살려 냄으로써 더욱 신비스럽게 보인다.
다음은 오래전 김창렬화백이 서울에서 전시회를 가졌을때의 신문기사이다.
그가 얼마나 물방울이라는 테마에 매달려 온 힘을 기울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인터뷰기에 옮긴다
작가와작품 [국민일보] 물방울 작가 '김창렬 화백'
[ 국민일보 ] 3년만에 서울전 갖는 김창렬 화백
2000/10/13 손수호기자
김창렬(71).‘물방울 작가’라는 닉네임으로 널리 알려진 화가.서울에서 태어났고 서울대 미대를 나와 뉴욕의 아트 스튜던트 리그를 수학했다.1965년 고국을 떠난 뒤 런던과 뉴욕을 거쳐 69년부터 파리에서 전업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전시를 위해 서울에 왔다.17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열리는 개인전은 97년 이후 3년만의 본격 전시다.그러나 여기서 그의 작가적 명성을 설명할 겨를이 없다.무려 일흔 세 차례의 개인전,프랑스의 자존심 퐁피두미술관이 작품을 사들였고,지난 3월7일 김대중 대통령과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과의 엘리제궁 만찬장에 그의 물방울 그림이 걸려 양국간 가교역할을 할 정도. 단어를 초월한 언어이자 인류 보편의 어법으로 받들어지고 있는 물방울이다.
따라서 새삼스럽게 작품론을 들먹이기보다는 그의 육성을 듣는 편이 낫겠다. 지난 10일 화랑측이 기습적으로 마련한 기자간담회에서 작가는 외부에 노출을 꺼리는 평소의 과묵함을 벗고 아끼던 이야기들을 자근자근 들려줬다.
-어떤 마음으로 물방울을 그리나.
△농부가 밭을 갈듯이,어린아이가 물장구를 치듯이.
-도대체 몇 방울이나 그렸나.
△1000호 대작에 3000개 정도가 들어간다.72년부터 30년간 2000여점을 그렸으니 계산해보라.
-물방울은 어떻게 탄생했나.
△파리에 건너갔을 당시 영롱한 물방울이 주는 철학성을 발견했다.처음에는 신문지에 그리다가 80년대에 들어 민화기법으로 깊이를 더했고 90년대부터 천자문 화폭으로 바뀌었다.
-한글도 넣으면 좋을텐데.
△한자는 신이 만든 걸작이라는 말도 있듯이 한글이나 영자에 비해 울림이 크다.
바탕의 천자문은 나의 유년기 향수를 자극하는 최상의 울림이다.
-당시 파리 화단의 반응은.
△서양 사람들은 직접적이고 즉물적인 것을 좋아한다.그래서 처음에는 물방울의 속성처럼 ‘곧 사라질 존재’로 보더라.어떤 정신과의사는 전람회에 와서 “아르망 같은 사람은 자동차를 두드려 패기도 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분노를 표현하느냐”고 물었다.그래서 ‘나는 인간사의 모든 희노애락을 물방울에 녹여 없앤다”고 말해줬다.
-요즘 아류가 더러 나오던데.
△처음엔 불쾌했지만 내 덕에 여러 사람이 먹고 산다고 생각하니 기분 나쁠 것도 없다.
-작가가 된 동기는.
△레오나르드 다빈치때문이다.중학때 근로봉사에 나가 대포알을 닦다가 학교에 오면 도서관에서 ‘세계사상전집’을 읽었다.거기서 ‘전인(全人)’을 발견하고 그를 좇았다.그러나 그는 화가라는 직업을 부끄럽게 생각했다.자연과학쪽의 재능이 사회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본 것 같다.비행기 만드는 일이나 성을 쌓는 일 따위….
-수염도 그를 흉내냈나?
△그의 자화상이 멋있지 않나.은연중에 영향을 받았을테지.
-레오나르도처럼 다른 일도 할 수 있을텐데.
△꾀꼬리는 여러 목소리를 못낸다.
-건강은.
△신부전증이 있어 1000호 대작은 더이상 못할 것 같다.그래서 이번 전시도 회화 40점과 조각 2점을 내놓지만 마음 한구석에 안팔렸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다만 내 그림 시세가 10년째 같은 가격이라 옛날에 산 분을 생각해 조금 올릴 생각이다.
대가 김창렬.한국미술의 트레이드 마크다.미국에는 백남준이 있고 일본에는 이우환이 있듯이 파리에는 그가 있다.작품에는 종이창을 때리는 빗방울, 한지 속으로 사라지는 이슬, 무쇠 사각틀 속에 놓인 수정 구슬이 있다.
그의 집 대문앞에도 이름 대신 물방울 하나가 그려진 문패가 걸려있다.
김창렬화백은 미국으로 떠나기전, 나의 서울예고 스승이셨다.
그는 나에게 미술의 기초, 뎃상을 가르치셨다.
윗 글을 스승님의 영전에 바친다.
Chris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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