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edeo Modigliani III
左로 부터 Modigliani, Picasso and André Salmon
.나의 저주받은 이탈리아의 눈이 파리의 광선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 모딜리아니 -
모딜리아니는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 畵派에 속한다.
일명 ‘몽파르나스 (Montparnasse)畵派)'라고도 한다.
다른 畵派처럼 특정 화풍을 이르는 말이 아니고 주로 동유럽 등 외국에서 온 화가들이 파리에 모여 활동한 집단을 말한다.
에콜 드 파리는 크게 3개 시대로 나뉜다. 모딜리아니는 1기(1900~20) 에콜 드 파리를 대표한다.
이 화파에는 모딜리아니와 같은 유대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벨라루스 태생의 마크 샤갈(Marc Chagall)과 샤임 수틴(Chaim Soutine), 리투아니아에서 온 자크 립시츠(Jacques Lipchitz), 불가리아 출신의 쥘 파스킨(Jules Pascin), 폴란드 태생의 모이즈 키슬링(Moise Kisling)등이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이 그룹에 속하지만 유대인이 아닌 유명 화가로는 스페인 말라가 태생의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전후 파리 시내 6구와 14구에 걸친 몽파르나스 가에는 다른 나라 출신의 화가, 음악인, 문인들이 모여 창작 활동을 했다.
공산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과 미국 문인 어니스트 헤밍웨이, 에즈라 파운드 등도 몽파르나스 예술인 구역에 있었다.
모딜리아니는 돈을주고 모델을 세우지 않았다,
너무 가난했던 그는 모델 구할 돈이 없어서 주변의 아는 사람이나 창녀들을 모델로 세워 그림을 그렸다.
1916년과 1917년 사이에 그는 집중적으로 조각과 누드에 탐닉했다.
그리고 이 누드 작품들을 모아 1917년 12월 3일 파리에서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개인전을 열었다.
그러나 운 나쁘게도 그의 개인전은 하루 만에 강제 철거를 당하고 말았다.
하필이면 개인전이 열린 베르트 베이유 화랑 맞은편에 경찰서가 있었던 게 화근이었다.
경관들은 화랑 쇼윈도에 걸린 모딜리아니의 누드 작품들이 음란하다며 당장 전시를 철거하지 않으면 작품들을 압수하겠다고 위협을 했던 것이다.
그는 파리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가난한 화가였다.
같은 에꼴 드 파리(Ecole de Paris)의 멤버였지만 한창 잘 나가는, 이젠 급이 달라진 피카소와 르누아르와는 처지가 달랐다.
모딜리아니 : 이런 저택을 살려면얼마가 있어야되죠?
르누아르 : 내 그림 두점이면 되지!
어디에도 속할수 없는 독창적인 화풍으로 자신만의 그림을 꿋꿋이 그렸지만 10프랑이나 압생트 한잔으로 그는 술집에서 초상화를 그려주곤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초상화를 그리는 동안 옆에 피카소의 그림을 걸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피카소의 좋은 기운을 받고싶어서 였다.
나의 저주받은 이탈리아의 눈이 파리의 광선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모딜리아니는 치욕에 몸을 떨었다.
아프리카 예술에 매료되어 조각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설상가상 가난한데다가 조각할때 생기는 먼지들로 건강이 나빠지고 결핵에 걸리고 만다.
또한 재료들도 너무 비싸서 조각을 그만둬야만 했다.
그렇게 하고싶은 조각도 할수없을만큼 병약했던 그가 택한것은 삶이 지속되는 동안 즐기는 것, 자기 파괴적 쾌락이였다
그는 술과 담배,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순간순간 찾아오는 죽음의 공포는 그를 걷잡을수 없이 방탕하게 만들었다.
그는 수잔발라동의 아들, 알콜 중독자 모리스 위트릴로랑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 Modigliani (모딜리아니)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너와 그가 아픔을 같이 했을때' - Modigliani의 대형 자화상 앞에서 촬영
이번 원고를 작성하면서 몇번인가 울컥울컥하며 치밀어 오르는것이 있어 잠시 쉬었다가, 고개를 쳐들어 마음을 가라앉히며 써야만 했다.
Modigliani가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에서 다른 동료들보다 쳐지고 인정을 못받은것은 그의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었다.
타고나기를 미끈하게 잘 생긴 외모에, 카페에 앉아 틈틈이 시집을 들춰내어 읽고 항상 고독해보이는 그에게는 여자들이 많이 따랐다.
모델이 되어주기를 간청하고 사랑을 갈구하고... 그는 타고난 왕자였다.
이런 꼴을 동료들이 시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악스럽게 판단을 빨리하며 눈치빠르게 줄을 잘 서고, 사리이욕을 챙기며 금전에 눈이 빠른 예술가들은 출세를 빨리했다.
내 나이 서른, 돈을 조금만 더 벌고 화단으로 돌아가겠다고 다짐하며 시작했던 직장생활은 평생 큰 상처로 남았다.
타고나기를 훤칠한 외모에 빈틈없이 잘 챙기고 나와 맡은일을 뛰어나게 잘하고 경제관념이 뚜렷하여 투자신탁에 돈을 맡기며 저축을 잘 하던 촉망받던 청년을 주변에서 시샘을 안할리 없었다.
더구나 홍익대학교 출신으로 외롭게 까마귀들 노는곳에 한 마리 백로였던것을.
인사고가가 있던 날, 왜 나만 누락되었는지, 고가 대상에 올리지도 않고 올렸다고 거짓말을 했는지를 책임자에게 따져 물었다.
답변은 '사회성 부족'이라는 말같지 않은 답변이었다.
'네가 우리와 함께 퇴근후 당구를 한번 쳐봤니? 돌아가며 화투를 한번 해봤니?
그 순간의 치욕을 잊을 수가 없다.
평생을 걸고 복수를 하기로 하고 그 직장을 나와 일본으로 건너갔다.
아트디랙터로 변신을 하여 귀국하고 보니...
복수를 할 대상은 이미 복수를 할 수도 없이 가엾고 추한 인생으로 변해 있었다.
경제적인 것 외에 그의 몰골, 인생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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