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獨白

autumn, esprit - 10월

Chris Yoon 2021. 11. 11. 07:37

 

 

 

10월 (비밀의 숲에서)           윤필립

 

 

들어봐

가을이 지나가는 소리를

이젠 곧 겨울이야

또 다시 우리는 긴 이별을 준비해야하고

내 가슴엔 지난 계절의 추억들이 낙엽처럼 쌓이고있어

나, 홀로 찾아오는 비밀의 숲 하나 있어

여름내내 난 행복했어

이곳에 찾아와 많은 생각을 하고

지난간 너와 나의 추억을 떠올렸어

그 숲에도 이제 바람이 불고 가을이 가고있어

봄에 태어난 왜가리들이 호수위를 날고

자신의 영역으로 까투리를 불러들여

사내로서의 구실을한 장끼가 한층 더 사내다워졌어

나도 긴 여름을 보내며 이곳에와서

여름의 욕정을 달래느라

왕꽃 벚나무 아래서 얼마나 많은 수음을 했던가?

그 숲에도 이젠 낙엽이 쌓이고 있어

가을은 이렇게 떠나가는가?

우리들의 빈 가슴에 공허함만 남겨두고

 

 

 

 

시월은 또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릴 것이다            이기철

 


시월의 맑고 쓸쓸한 아침들이 풀밭 위에 내려와 있다
풀들은 어디에도 아침에 밟힌 흔적이 없다
지난 밤이 넓은 옷을 벗어 어디에 걸어놓았는지,
가볍고 경쾌한 햇빛만이 새의 부리처럼 쏟아진다

언제나 단풍은 예감을 앞질러 온다
누가 푸름이 저 단풍에게 자리를 사양했다고 하겠는가
뜨거운 것들은 본래 붉은 것이다
여읜 줄기들이 다 못 다독거린 제 삶을 안고
낙엽 위에 눕는다
낙엽만큼 쓸쓸한 생을 가슴으로 들으려는 것이다

욕망을 버린 나뭇잎들이 몸을 포개는 기슭은 슬프고 아름답다
이곳에서는 흘러가버릴 것들, 부서질 것들만 그리워해야 한다
이제 나무들이 푸른 이파리들을 내려놓고 휴식에 들 때이다
새들과 들쥐들이야 몇 개의 곡식이면 족하지 않겠는가

망각만큼 편안한 것은 없다
기억은 밀폐된 곳일수록 조밀해진다
이제 가을바람이 남겨놓은 것들만이
내 것이다

시월은 또 작년의 그 자리에서
오래 참으며 나를 기다릴 것이다

 

 

 


10월                        이기철

 

 

'시월' 하고 부르면 내 입술에선 휘파람 소리가 난다

쓸쓸한 것과 쓰라린 것과 서러운 것과 슬픈 것의 구별이 안 된다

그리운 것과 그립지 않은 것과 그리움을 떠난 것의 분간이 안 된다

누구나를 붙들고 '사랑해'라고 말하고 싶은 순간이

이마에 단풍잎처럼 날아와 앉는다

연록을 밟을 때 햇빛은 가장 즐거웠을 것이다

원작자를 모르는 시를 읽고 작곡가를 모르는 음악을 들으며

나무처럼 단순하게 푸르렀다가 단순하게 붉어질 수 있으면 좋겠다

고요한 생들은 다 죽음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다녀올 수 있으면 죽음이란 얼마나 향기로운 여행이냐

삭제된 악보같이 낙엽이 진다

이미 죽음을 알아버린 나뭇잎이 내 구두를 덮는다

시월은 이별의 무늬를 받아 시 쓰기 좋은 시간이다

 

 

 

 

10월                        오세영

 

 

무언가 잃어간다는 것은

하나씩 성숙해 간다는 것이다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돌아보면 문득나 홀로 남아 있다

그리움에 목마르던 봄날 저녁

분분히 지던 꽃잎은 얼마나 슬펐던가

욕정으로 타오르던 여름 한낮

화상 입은 잎새들은 또 얼마나 아팠던가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때,

이 지상에는외로운 목숨 하나 걸려 있을 뿐이다

낙과(落果)여, 네 마지막의 투신을 슬퍼하지 말라

마지막의 이별이란 이미 이별이 아닌 것

빛과 향이 어울린 또 한번의 만남인 것을

우리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별을 갖기 위해서

오늘도잃어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