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이야기

이 한 장의 흑백사진 - 내 젊은날의 겨울바다

Chris Yoon 2021. 11. 11. 03:35

 

 

젊은 날, 내가 좋아한 바다는 바람이 차고 쓸쓸한 겨울 바다였다.
어촌 사람들의 가난한 흔적만 남고 어지러운 발자국들은 말끔히 씻겨나간 작고 조용한 바다였다.

해송을 끼고 활처럼 굽은 해안선 허리를 따라 걸어갔다.
걷는 동안 육신과 마음이 고요해지고 몇 마리 마른 물고기가 널려 있는 해녀의 집을 지나거나
바닷가에 세워둔 뱃전에 가만히 흔들리며 앉아 있는 동안 마음이 편안해지는 바다였다.

도종환의 <내가 좋아한 바다>에서발췌



사람은 누구나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아두길 원한다
부질없는 욕심인 줄 알면서도 지나가는 시간을 자기 앞에 정지시켜 놓고 오랫동안 바라보길 원한다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사실 사진은 너무 흔해졌다.

통신 산업의 발달로 디지털 카메라와 카메라폰이 보급되며 그 덕분에 누구나 쉽게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이처럼 사진이 범람하면서 역설적이게도 마음속에 깊이 담아두고 싶은 추억이 깃든 사진들이 사라지고 있다.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 어쩐 일인지 우리들의 정신은 점점 더 곤핍하고 경박해져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던 시절,

그러면서도 궁핍해서 때로는 분노마저 삭이며 미래마저 포기해야만 했던 시절.
그 시절은 여전히 우리들의 가슴 밑바닥에 앙금으로 남아있다

 

윗 사진은 참으로 오래전의 사진이다
머리를 짧게 자른걸보니 대학 3학년, 군대를 가기전이었다
앳된 얼굴에 당시 음악다방 D.J.들이 하던 스카프를 멋지게 두르고 폭넓은 판탈롱바지에 주름을 잡았다
사진을 찍어준 사람은 바닷가를 떠돌며 기념사진을 찍어주며 돈을 받던 앳된 단발머리 소녀였다
바닷물이 밀려드는 곳, 겨우 젖지않을 만큼의 경계선에 멋을 한껏 내어 비스듬히 누워 포즈를 잡았다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등록금을 마련하기 힘들어 군입대를 결정하고 머리를 짧게 자르고 마지막 여행을 하고싶어 남쪽 바다엘 갔었다
부산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부산에서 다시 경주로 가는 완행열차를 갈아탔다
부산에서 출발한 기차는 바다를 끼고 거의 반나절을 천천이 느릿느릿 해안선을 달렸다
가는내내 처음보는 어촌풍경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앞마당까지 파도가 넘실대는 작은 어촌의 집들, 돌담에 널어놓은 낡고 찢어진 그물...
이따금 해안선 모래 위까지 밀려나와 있는 해초들.
경주 거의 다가서 울산이라는 작은 어촌에서 내렸다
그리고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좁은 신작로를 달려 방어진이라는 항구에 도착했다
항구... 옛날 바닷가 항구는 왜 그리 조악스럽고 외설스러웠던가 ?
부둣가에 바짝 붙어선 극장의 간판엔 누군지도 모르게 어설프게 그린 여배우와 남자배우의 얼굴이 뜨겁게
얽혀있고 한낮의 스피커에선 유행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배가 묶인 부둣가에는 연탄풍로에 솥을 걸고 고래고기를 삶아파는 아낙들과 늘어선 선술집과
그물어망을 펼치고 잡어를 널어 말리는 아낙들과 아랫도리를 벗은 올망졸망한 아이들 노는 소리와
느릿느릿 게으른 동네개들이 권태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부두를 벗어나 등대쪽을 물어서 발걸음을 옮겼다
가는내내 푸른 보리가 언덕을 덮고 소나무 숲을 지나 붉은 꽃송이를 단 동백나무들이 산등성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렇게 걷다보니 푸른 나무숲 사이로 허연 물고기의 배같이 드러나는 바다,
그것이 젊은 날, 내가 좋아한, 바람이 차고 쓸쓸한 겨울 바다였다.
그러나 누가 알까? 저 해맑은 미소뒤에는 3년6개월간 내 젊음을 저당 잡히고 인간의 본질을 상실 당한체
마지못해 끌려가야만 했던 군사정권시절의 군복무가 펼쳐지기 직전의 사진이란걸.

 

- Chris Nicol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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