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도 가을에 물들다 VIII - 교촌마을
서라벌 1000년 교촌마을에 밤이 깃든다.
늬엿늬엿 지는 저녁해를 보내고 나그네들은 또 어디서 잠을 잘까
그 소란하게 몰려다니던 사람들도 모두 어디론가 가버리고 옛 흙담 골목길은 고즈넉하다
이제 내가 나그네가 되어보련다.
'교촌마을'은 향교가 있는 마을을 뜻한다.
즉 교촌마을이 경주에 있는 교촌마을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향교가 있는 마을은 모두 교촌마을이라고 보면 된다.
경주 향교는 신라 신문왕 2년(682년)에 국학이 세워졌던 곳이다.
이는 고려시대의 향학, 조선시대 향교로 명맥이 이어졌다.
교촌마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경주교동법주가 있다
아쉽게도 향교도 내부를 고치느라 사진촬영이 불가피했다.
교촌마을은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 9대에 걸쳐 진사(進士)를 배출한 경주 최부자의 얼이 서린 곳이다. 특히 최부자집에서 가훈처럼 내려온 원칙인 “벼슬은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 곳에는 원효대사와의 사이에 설총을 낳은 신라 요석공주가 살던 요석궁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전해지며, 부근에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서려 있는 계림과 내물왕릉, 경주향교, 김유신 장군이 살았던 재매정이 있다.
교촌마을에는 재주가 많은 젊은이들이 많다.
도기를 굽는 청년, 염색을 하는 처녀, 메주를 잘 띄워 장을 잘 담는 아낙네, 두부를 잘 만드는 아저씨...
아무튼 재주꾼들이다.
그들이 모두 교촌마을에 간판을 내걸고 그 재주랑 돈을 바꾼다.
그 실력들이 만만찮게 신라시대의 그것들과 구분이 안갈 정도로 흡사하게 만들어 내놓는다.
나는 감탄을 했다. 저 '천마도 말다래'가, 아니... 저 향로며, 궁녀상, 장군상, 화병, 술병들이 모두 저 젊은이 빚어냈다니..
나는 그에게 고개를 숙여 목례를 했다.
그는 한지를 펼쳐놓고 뭔가 작업을 하다가 나의 예우를 갖추는 태도에 아연해 서있었다.
나는 그의 작품들을 좀 더 많이 촬영하고 싶었다.
그에게 축복을 빌어주면서...
- Photo : Chris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