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林院址에 가서 - 이상국
禪林院址에 가서 이상국
禪林으로 가는 길은 멀다
미천골 물소리 엄하다고
초입부터 허리 구부리고 선 나무들 따라
마음의 오랜 폐허를 지나가면
거기에 정말 禪林이 있는지
영덕, 서림만 지나도 벌써 세상은 보이지 않는데
닭죽지 비틀어 쥐고 양양장 버스 기다리는
파마머리 촌부들은 禪林 쪽에서 나오네
천년이 가고 다시 남은 세월이
몇번이고 세상을 뒤엎었음에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근 농가 몇채는
아직 面山하고 용맹정진하는구나
좋다야, 이 아름다운 물감 같은 가을에
어지러운 나라와 마음 하나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소처럼 禪林에 눕다
절 이름에 깔려 죽은 말들의 혼인지 꽃들이 지천인데
經典이 무거웠던가 중동이 부러진 비석 하나가
불편한 몸으로 햇빛을 가려준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여기까지 오는데 마흔아홉 해가 걸렸구나
선승들도 그랬을 것이다
남설악이 다 들어가고도 남는 그리움 때문에
이 큰 잣나무 밑동에 기대어 서캐를 잡듯 마음을 죽이거나
저 물소리 서러워 용두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슬픔엔들 등급이 없으랴
말이 많았구나 돌아가자
여기서 백날을 뒹군들 니 마음이 절간이라고
禪林은 등을 떼밀며 문을 닫는데
깨어진 浮屠에서 떨어지는
뼛가루 같은 햇살이나 몇됫박 얻어쓰고
나는 저 세간의 무림으로 돌아가네
禪林院址 / 선림원지는 설악산국립공원 남쪽의 미천골에 자리한 통일신라시대의 옛 절터로서
804년에 창건되어 흥각선사가 번창시킨 사찰로 당대 최고의 선 수련원이었다.
10세기 전후에 대홍수와 산사태로 매몰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닿지 않아 원시의 자연이 아주 잘 보존된 미천골 자연휴양림 안에 있다.
미천골(米川谷)이란 명칭도 선림원이 번성할때 스님들의 공양을 위해 쌀을 씻으면 그 물이 20리나
흘러 갔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법흥왕 때 창건했다가 고려말에 폐사되었다는 선림원터에는 지금도 선림원지 홍각선사 탑비와
석등(신라 정강왕 원년 건립,886), 3층석탑, 부도 등의 보물급 문화재가 남아 있다.
이상국시인은 옛사찰 터만 남아 있는 禪林院址에 가서
양양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곳에서 살아온 시인답게 세상사, 혹은 인간사를 직시한다.
그래서일까. 그 속에서 환기되는 묘사는 한 폭의 풍속화를 보듯 토착적 정서를 물씬 느끼게 한다.
시인은 폐허가 된 천년고찰의 향기를 시를 통해 고스란히 되살려낸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여기까지 오는데 마흔아홉 해가 걸렸구나
선승들도 그랬을 것이다
남설악이 다 들어가고도 남는 그리움 때문에
이 큰 잣나무 밑동에 기대어 서캐를 잡듯 마음을 죽이거나
저 물소리 서러워 용두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슬픔엔들 등급이 없으랴
이 대목에서 기가 막히다
자연이 너무 깊고 고요하면 인간의 애욕이 발동한다는 것을 어찌 이리도 절묘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선승도 어쩔 수 없이 용두질을 했을 禪林院址의 고요로움.
마음의 폐허를 지나 태백산맥 오지의 자연 속에서 인간사 희노애락의 깊은 층위까지 섬세하게 짚어낸
시인의 언어로 육화해낸 이 작품을 통해 시적 아름다움과 성찰의 깊이가 무엇인지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