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 신현림
2020. 12. 4.
지극히 혼란스런 의식이 새벽강처럼 고요해졌으면,
실수와 후회, 치욕스런 기억에 시달릴 때
시원스레 소나기가 쏟아졌으면,
잔인한 말 던진 자를 용서했으면, 그냥 잊었으면,
권태롭고 적막한 오후 세시경이면
전화라도 그냥 수다스럽게 울렸으면,
나처럼 이 시대의 나약한 바보 울보들이
천천이 비빔밥을 먹고 커피 마시듯 음미했으면,
갑작스런 사건에 놀라 허둥대지 않으며
추억의 지진으로 시간이 사망하지 않았으면,
진지함과 활달함의 변주곡 속에서 하루가 무사하고
우리 애인들 모두 안녕하였으면,
어서 쓸쓸한 저녁이 갔으면,
이 불안의 바퀴도 날아갔으면,
온몸 미칠 듯 번지는 칸나 같은 바퀴가 멈췄으면, 제발 멈췄으면.
오랜만에 오래된 친구와 만나 점심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고, 기분전환을 할겸 차를 몰아 양평쪽으로 갔다.
북한강을 따라 흐르는 단풍이 한창이다.
우리는 차를 세우고 강가로 내려가 강길을 걷다가 나무아래 벤취에 앉았다.
우리는 많이 지쳐있다.
세월에 지치고, 우리가 살고있는 나라의 정치와 경제에 대한 뉴스보도에 지치고, 이미 지난해 말부터 코로나19라는 우환폐렴에 지치고, 하루에 확진자가 500명 이상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에 놀라 지치고, 그 질병에 전염되지 않으려
좀 더 촘촘한 마스크를 사서 쓰고 생활하기에 지치고...
서로 의심하며 접근을 피하다보니 사업이 여의치않아져 경제가 기울어 지치고... 그렇게 어느새 우리는 지쳐있었다.
우리는 젊은시절에 신현림 시인의 시를 좋아했었다.
그때 우리는 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회사를 다니며 일을하고, 술을 마시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고,
때로는 우울한 詩를 암송하기도했다.
그때 책이 가득 든 가방이 있었고
낙서판 같은 탁자마다 술이 넘쳐 흘렀네
괜찮은 사내며 계집이며
가까워질수록 잃을까 불안한 심정이며
시대가 혼란스럽고 취직이 힘들수록
쟁기처럼 단단해져야 할 마음이여
「아침이슬」과 미칠 듯이 파고드는 러시아 민요
「검은 눈동자」를 들으며 몸 저리게 서러웠네
세월의 징검돌을 밟고
그들은 내 곁을 스쳐갔네
다시 칠 년 다시
소독약보다 지독한 시간이여
청춘의 횃불이 꺼져간다
괴로워야 할 치욕도 상처의 저수지도 잊어가고
우리의 숙명인 열정도 식어간다
근근히 살아가는 고달픔이란,
너는 허기져 삽살개를 찹쌀개로 헛발음하고
시계 사준다는 말이 나는 시체 사준다는 말로 들리고
혼자가 싫어 드라큐라라도 함께 있고픈 주말
사나운 날씨를 못 견뎌 헤매는 오후 네시
울지 않으려고 웃으면서
나는 나에게로 돌아간다
- 신현림의 '나는 나에게로 돌아간다'
이제 세월은 흘러 우리는 어느덧 황혼을 바라보게 되었고 쇠약해졌다.
한때 좋아했던, 우울하고 다소 비관과 염세로 얽혀졌던 詩語들.
이제 그마저 우리에겐 불안하게 다가오는듯하다.
이 불확실한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견디어 나가야할까?
- Poem : 신현림 : <불안>에서 발췌
- Photo : 李象國
- Copy : Chris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