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 기형도
노을 기형도
하루 종일 지친 몸으로만 떠돌다가
땅에 떨어져 죽지 못한
햇빛들은 줄지어 어디로 가는 걸까
웅성웅성 가장 근심스런 색깔로 서행하며
이미 어둠이 깔리는 소각장으로 몰려들어
몇 점 폐휴지로 타들어가는 오후 6시의 참혹한 형량
단 한 번 후회도 용서하지 않는 무서운 시간
바람은 긴 채찍을 휘둘러
살아서 빛나는 온갖 상징들을 몰아내고 있다.
도시는 곧 활자들이 일제히 빠져 달아나
속도 없이 페이지를 펄럭이는 텅 빈 한 권 책이 되리라.
승부를 알 수 없는 하루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패배했을까, 오늘도 물어보는 사소한 물음은
그러나 우리의 일생을 텅텅 흔드는 것.
오후 6시의 소각장 위로 말없이
검은 연기가 우산처럼 펼쳐지고
이젠 우리들의 차례였다.
두렵지 않은가.
밤이면 그림자를 빼앗겨 누구나 아득한 혼자였다.
문득 거리를 빠르게 스쳐가는 일상의 공포
보여다오.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가 살아 있는 그대여
오후 6시
우리들 이마에도 아, 붉은 노을이 떴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지?
아직도 펄펄 살아 있는 우리는 이제 각자 어디로 가지?
하루종일 살아나가기 위해 거리의 골목을 기웃거리고, 먼 곳으로 일거리를 찾아 떠났다가 전철을 타고 급히 돌아오고, 낯 익은 거리로 돌아오면 마음이 느긋해지며 안식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아무튼 우리는 낯 선 곳에서 하루종일 맴돌다가 석양무렵 자신의 거처로 돌아와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는 것으로 아무리 힘들어도 버티며 살아왔다.
그런곳이 고향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탯줄을 끊은곳보다 자신이 어찌하다 굴러들어와 하나하나 정을 붙이며 살기 시작하여 이제는 끊을 수 없는 곳이 우리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나에게 그런 곳은 잠실이다.
잠실은 50년 전만해도 진흙밭에 배추와 무를 경작하며 군데군데 뽕밭이 펼쳐진 못 쓸 땅이었다.
뚝섬에서 나뭇짐을 싣는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면 발걸음을 뗄 수 없는 진흙밭을 지나 뎅그러니 봉원사 하나만 있고 허허벌판에 한강물이 들어왔다가 물길이 끊어져 만들어진 석촌호수만 있었다.
그런 곳으로 들어와 나는 40년을 살았다.
밤에 잠을 자려 잠자리에들면 전설같이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는 소리가 들리는듯했고 벗은 몸, 등위로는 누에가 기어다니는 꿈을 꾸며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면 송파의 넓은 빈 땅에 주유탱크를 파서 임시 카센터가 들어서고 지나다니는 차들이 주유를 하고 강남으로 빠져나가고 2호선 전철이 하루종일 맴돌며 성내역에서 내리면 고만고만한 시민아파트사이로 잠실성당 하나가 제일 높았던 동네로 탄천을 건너자마자 주공고층, 장미, 미성, 진주아파트가 생기고 올림픽 경기장이 생기면서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곳.
이제 그곳이 명실공히 한국의 맨허턴이 되었고 세계에서 몇째 안가는 125층 고층 빌딩이 들어섰다.
나는 이 빌딩이 들어서기전, 동춘서커스가 와서 천막을 치고 나팔을 불며 석양무렵 향수를 불러 일으키던 시절부터 빈 터를 바라보며 살았다.
그리고 그 높은 타워가 일년에 한번씩 화려한 불꽃놀이를 하는 것까지 늦은밤 테라스에서 보았다.
내몸이 지치고 고갈되면 스스럼없이 찾아들어가 국수를 사먹고 더위를 피하다가 나오던 곳.
이제 나이가 들고 나는 어디로 가서 안식을 찾아야할까?...
6시, 붉은 노을이지면 내 마음은 어디로 들어가야할까?
We were born to be just losers.
Anything can happen.
This is our last goodbye and very soon it will be over.
우리는 패배자가 되기 위해 태어난듯.
우리에겐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
이게 우리의 마지막 인사이고, 이 순간도 곧 지나갈 것이다.
* 롯데월드타워 전망대 서울스카이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모습.
비어있는 공터는 재건축을 진행 중인 '잠실진주'아파트를 철거한 자리입니다.
40년을 살아온 잠실에서 재건축이라는 명목으로 물러나 지금은 남한산성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게다가 살던 곳을 떠나와서인지 암까지 걸려서 항암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이제 그곳, 잠실에 초현대식 아파트가 들어서면 내 나이 일흔여덟, 아홉..
다시 돌아갈 수 있을런지요?
-尹馝粒(윤필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