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잔, 바람의 말 - 김선우
그녀의 입술이 내 가슴에 닿았을 때
알 수 있었다, 흔적
휘파람처럼 상처가 벌어지며
그녀가 나의 세계로 걸어들어왔다
유리잔 이전이었던 세계, 바람이 나를 낳고
달빛이 이마를 쓸어주던 단 한줌 모래이던 때
그때 아직 그리움은 배냇누이라서
알 수 있었다, 내게로 온 그녀는
날개 상한 벌을 백일홍 붉은 꽃잎 속에 넣어주던
마음을 다치기 이전의 그녀였다
우리는 달빛 속에서 오래도록 춤을 추었다
그녀의 등줄기를 따라 바람이 강물을 길어왔고
입을 것이 없었으므로 맨몸인 우리는
상처에 꽃잎을 달아줄 수 있었다 한줌 모래이던
사금파리 별을 잉태했던 우리는,
날이 밝기 전 그녀는 떠날 준비를 했다
길은 지워져
달빛도 백일홍 꽃잎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그녀는 다시 왔지만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희망을 갖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약점인지 아느냐,
몇마디 욕지거릴 씹어뱉고 독주를 들이켜더니
화장을 고치고 나가버렸다
내 가슴에 선명한 입술자국,
붉은 씨방을 열고 백일홍 꽃잎 떨어져내렸다
술잔, 바람의 말 - 김선우
우리는 삶이 무료하거나 지칠때 여행을 떠납니다
자신이 살던 환경과 달리 낯 선곳에서, 우리는 자신들의 관습을 쉽게 벗어 던지고
선뜻 이탈을 해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행을 다녀오면, 마치 기념품처럼 남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혼자만 알고 간직하고 싶은 그리움입니다
선뜻 할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하고 돌아온 자신의 낡고 오래된 집.
그곳에서 죽는날까지 여행지의 비밀을 안고 우리는 살아갑니다.
오늘부터 몇일간은 여행길의 이탈들을 담은 詩 몇 편을 올려드립니다
Chris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