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Vie en rose (장미빛 인생)
'Non, je ne regrette rien'
1970년대에 金 炫 과 보았던 최초의 연극오페라.|
30년 전으로 기억한다
한참 잘 나가던 모회사 기획조정실에 근무할때 이야기다
어느날 김현이 다가와서 내게 물었다
"윤형, '에디뜨 삐아프'에 대해 잘 알아요? (그때만 해도 우리는 서로 정중하게 존대어를 썼었다)
" 예. 잘은 몰라도 그 여자 유명한 샹송가수 였지요. 성장배경도 무척 안좋고 거리의 여자로 성장하다가 캬바라에서 노래를 부르며 유명해 졌지요."
나는 아는대로 대답했다.
김현은 그 날 회사를 마치고 그녀의 삶을 다룬 뮤지컬을 보러 가자는 것이었다.
그때 김현은 여러가지 문화부문에 걸친 아르바이트를 많이 하고 있었다.
학생시절부터 학비를 벌려고 뛰어다녔던 경력들이 인정을 받으며 제법 굵직한 단체에서도 그에게 일을 의뢰해왔다.
그는 당시 대표이자 기획자였던 김의경 단장이 이끄는 현대극단의 각종 포스터를 담당하고 있었다.
<빠담 빠담 (두근 두근 이라는 뜻)이라는 이름의 뮤지컬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 그가 만든 포스터를 선명히 기억한다
에디뜨 삐아프 역을 맡은 윤복희를 에디뜨 삐아프가 노래할때 전형적인 포즈인 양손을 X字로 클로즈해서 가슴에 모으는 흑백사진을 대담하게 콘트라스트 처리를 해서 중간톤을 없애고 제목을 자유분방하게 흘려넣은 파격적인 포스터였다.
사진은 당시 시공간 스튜디오를 경영하던 김승태가 촬영했었다.
연극과 오페라를 구분지었던 그 당시, 이 공연은 연극-오페라 양쪽의 수준을 떨어뜨린 저급한 문화로 취급되었고 상업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많은 인기와 관객몰이로 우리나라에 뮤지컬이라는 새로운 쟝르의 효시가 되었다.
이브 몽땅과의 사랑에 포커스를 맞춘 이 공연은 연출과 기획면에서도 호평을 받았지만 에디뜨 피아프役의 윤복희와 이브 몽땅役엔 가수 한상일, 그리고 코메디언 故곽규석의 열연으로 더욱 화제를 모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특히 윤복희의 작고 깡마른 체구에 그 당시론 상당히 파격적인 짧게 보글보글 파마를 한 에디뜨 피아프의 머리흉내와 수박색 실크블라우스의 고급스런 하늘거림도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생생하다.
요즘 각종 영화및 드라마, C.F.에 사용되면서 다시 신세대에게 어필하는 노래가 되어 30년 전의 생각을 꺼내어 적어 보았다.
현이는 이런 귀한 추억들을 기억이나 하는지...
* 金 炫은 88올림픽의 Simbol- 호돌이를 그래픽한 現 Design Park의 대표이자 우리나라 Design계의 1세대로서
나와 대우 기획조정실에서 함께 근무를 했었다.
프랑스의 국민가수로 제 2차 세계대전 후 최고의 여성가수 에디트 피아프는 1915년 12월 19일 프랑스 파리의 가난한 노동자 구역인 베르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였고, 아버지는 거리의 곡예사였는데, 엄마 아네트는 삼류 가수로 여기저기에서 노래를 부르며 커리어를 쌓기를 원해 어린 딸을 부양할 수 없었다고 해요. 에디트는 알코올중독자인 외할머니한테 맡겨지고 그 후 친할머니에게 맡겨지면서 에디트는 창녀촌에서 유아 시절을 보내는데, 가난 때문에 영양실조와 시력을 잃을 위기에까지 처할 정도로 에디트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한다.
15세 때부터 골목을 누비며 노래를 불러 생활하여, '자니즈'라는 카바레의 가수가 되었으나 살인 사건에 말려들어 실의의 나날을 보내면서 지낸 에디트 피아프.
주위의 격려를 받아 재기, 〈나의 병정 아저씨〉 등을 불러 성공하였고, 1940년에 장 콕토의 희곡을 홀로 연기를 하면서 직접 작사한 〈장밋빛 인생〉, 〈사랑의 찬가〉 등을 불러 히트시켰으며, 《파리의 기사(騎士)》(1951년, ACC), 《파담 파담》(1952년, ADF)으로 디스크 대상 수상
연극같은 삶을 살다 47세 되던 해 술과 마약 중독으로 세상을 떠난 그녀지만.. 프랑스의 국민가수로 그녀의 음악은 우리가슴에 영원히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