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 II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 II
어린시절부터 그림을 잘 그렸던 나는 유교적 교육을 받으며 양반집안의 걱정거리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전, 글을 깨우쳐주려고 종이와 연필을 가져다주면 글씨 연습은 안하고 그림을 그렸다.
나가서 보았던 것들, 말이나 소, 염소, 나무, 꽃들을 그려냈고 특히 사람의 얼굴을 잘 그렸다.
그중에서도 예쁜 여성들의 얼굴을 유난히 잘 그렸다.
동네안에서는 '그림 잘 그리는 아이'로 소문이 났고 그 소문은 멀리까지 퍼져 이곳 저곳 불려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대여섯살 짜리가 척척 그려내는 그림을 보며 모두들 신기하고 놀라워하며 보고있다가 도화지와 크레파스를 사라고 돈을 주었다.
그러나 우리집에서는 내가 성장을 하면서 걱정이 깊어졌다.
당시만해도 그림을 그리면 환쟁이라고 불리우며 남의 초상화나 그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앞으로 천하게 불려다니며 남의 면상이나 그려주고 몇푼씩 받으며 얼마나 가난하게 살려고 저러누..'
어른들의 걱정은 깊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예고를 가기위해 집을 나왔다.
서울예고부터 본격적인 예술가의 수업을 시작하여 홍익대학을 거치고 뉴욕까지 진출했다.
그 아이의 머릿속엔 온통 이태리로 가고싶은 생각뿐이었다.
대리석이 많은 나라, 그래서 뛰어난 조각가들이 많이 배출된 나라.
늘 꿈을 꾸면서도 직장생활에 고된 생활고에, 보수적이고 봉건적인 관습과 국내실정으로는 기회가 오질 않았다.
제법 나이가 들고 미술관과 유적지가 많은 로마로 가서 시뇨리아 광장을 찾아갔다.
5월의 뜨거운 햇살아래 시뇨리아 광장은 북적이며 미술품을 구경하는 사람들과 그늘에 앉아 쉬는 사람들로 가득찼다.
그 감동으로 아직도 가슴은 뛰고있다.
그중 몇개의 명작과 모각이지만 감동을 받아 진품을 찾아 미술관까지 간 조각(彫刻)들을 올려보려한다.
피오 페디의 <폴릭세나의 강탈 (The Rape of Polyxena)> 19세기 작품.
폴릭세나는 트로이의 공주이다.
아킬레스에게 오빠들이 죽자 미모로 아킬레스에게 접근하여 결혼을 약속하고 아킬레스의 약점(뒤꿈치)을 알아낸 후 파리스에게 알려줬다.
약점을 알아낸 파리스가 쏜 독화살을 뒤꿈치에 맞고 아킬레스는 죽고 말았다.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가 승리한 후 인질로 잡혀온 폴릭세나가 아킬레스의 아들인 네오프톨레모스에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이다.
잠볼로나의 <사비네 여인의 강탈> 16세기 작품.
고대 로마에서 결혼할 여자가 부족하자 사비네 여인들을 납치해서 데려왔다.
'사비니 여인의 납치(The Rape of the Sabine Women)'는 로마 신화에서 로마의 남자들이 다른 도시의 여인들을 집단으로 납치한 사건을 말하는데, 이는 예술의 주제로 즐겨 다루어져 왔고 특히 르네상스와 후기 르네상스 시대의 작가들에 의해 자주 등장하고 있다. 피카소도 그린것이 있다.
'강탈(rape)'이란 뜻의 라틴어 라프티오(raptio)는 사건에 관한 고대 이야기에서 쓰여져 왔는데, 오늘날 학자들은 이말을 '강탈, 강간' 대신 '납치나 유괴'로 해석하고 있다.
로마병사가 사비니 여인을 납치하고 허공을 향해 팔을 내저으며 저항하는 여인, 이런 딸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며 당하는 아버지의 표정이 실감나게 처리되었다.
'사비니 여인의 납치(The Rape of the Sabine Women)'는 다음에 따로 다룰 예정이다.
미켈란젤로의 David (다비드)像
지구상에 현존하는 가장 아름다운 남자 조각상이자 인체의 건강한 아름다움의 상징이 된 미켈란젤로의 David.
미켈란젤로가 천재라는 점을 입증한 사실은 David상이 요즘 신성시 하는 황금비율이 아니라는 점이다.
David상은 머리와 손이 지나치게 크게 과장되어있다. 특히 손등의 핏줄과 돌출된 이마, 그리고 머리가 크다.
이는 제작 당시 다비드 상이 성당의 버팀벽 높은 곳에 설치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높은 곳에 위치한
조각상을 아래서 위로 올려다 보았을 때를 감안하여 미켈란젤로가 일부러 그렇게 제작한 것이다.
완성작을 보고 위원회에서는 진정으로 최고의 작품이라 높은 곳에 설치하기로 했던 일을 없던 것으로 하고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시뇨리아 광장으로 설치 장소를 바꿨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대단한 조각가인가를 알려주는 일화다.
피렌체엔 David 조각상이 셋이나 있다. 하지만 셋 중 둘은 복제품이다.
하나는 피렌체 시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높은 언덕에 있는데 가짜임에도 불구하고
유명해져서 그 조각이 있는 곳을 미켈란젤로 언덕이라고 이름까지 붙여져서 관광코스가 되었다.
또 한 개는 처음 놓였던 시청 앞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데 역시 복제품이다.
그렇다면 진짜는 어디에 있을까?
David는 1504년에 완성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보티첼리 등 원로들에 의한 설치장소 검토가 위원회에서 논의된 끝에 미켈란젤로의 희망대로 팔라초 베키오 입구 앞에 세워두었다.
그런데 피렌체 동란 때 한쪽 팔을 손상해서 광장에는 모상(模像)을 두게되었다.
높이는 4.34m이며, 1873년에 현재의 Galleria dell'Accademia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겨졌다
카쿠스(Cacus)를 죽이는 헤라클레스(Heracles) 1525~1534년
헤라클레스는 출생부터가 비극적이었다.
헤라클레스는 제우스가 이미 결혼한 여인인 알크메네와 동침하여 얻은 아들이다.
알크메네의 남편 암피트리온이 전쟁에 참가하여 집을 비운 틈을 타서 제우스는 암피트리온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마치 전쟁에서 귀향하는 것인양 알크메네를 속였다. 이날 밤 제우스는 밤의 길이를 늘려 보통의 밤 보다 3배나 긴 밤을 알크메네와 보냈고, 알크메네는 암피트리온으로 변신한 제우스로부터 수태하게 되었다.
진짜 남편 암피트리온이 전쟁터에서 귀향하여 알크메네와 잠자리를 같이 하자 쌍둥이, 다시 말해 제우스와 그리고 암피트리온으로부터 각각 헤라클레스와 이피클레스, 두 아들을 수태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이 둘을 구별할 수가 없었다한다.
Cacus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인데 이야기에 따라 모습이 거인이나 켄타우로스 혹은 머리 세개달린 괴물로 묘사되기도 한다. 불을 뿜으며 불카누스(헤파이스토스)의 자식으로 알려졌는데 로마가 건설되기전 티베리스 강 주변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잡아먹고 살았다. 헬라클레스는 12과업인 게리온의 소떼를 몰던 중 밤이 되자 잠을 잤는데, 하필이면 카쿠스가 네마리의 소의 꼬리를 잡아 끌고가는 등 교활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소들의 울음소리 때문에 카쿠스의 동굴을 찾아내고, 카쿠스가 불을 뿜어 헤라클레스를 공격하지만, 헤라클레스가 목을 꺽여 죽인다.
조각가 : Baccio Bandinelli
1526~50년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로 메디치가(家)의 총애를 받은 피렌체의 조각가이다.
메디치가의 후원을 받았던 아버지 미켈레 디 비비아노 데 브란디니는 그를 금세공인으로 키웠지만 조각을 무척 좋아해서 조각가 조반니 프란체스코 루스티치 밑에서 일했다. 토스카나의 대공인, 메디치가의 코시모 1세의 궁정에서 수석 미술가가 되었고 바티칸(1531)과 피렌체(1550경)에 미술학교를 세웠다.
조르조 바사리가 쓴 〈화가들의 생애 Lives〉와 벤베누토 첼리니의 〈자서전 Autobiography〉에는 그가 질투심이 많고 사악하며 재능없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그는 1530년부터 반디넬리로 성(姓)을 바꾸었다.
남아 있는 작품들을 보면, 그가 당대의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조각가였음을 알 수 있다. 〈라오콘 Laocoön〉(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의 복제품과 〈헤라클레스와 카쿠스 Hercules and Cacus〉(1534, 시뇨리아 광장 소재), 피렌체 대성당 성가대 칸막이의 부조를 보면, 절제되고 지극히 사실적인 그의 작품이 메디치 궁정에서 어째서 많은 인기를 누렸는지 알 수 있다. 말년에는 첼리니와 바르톨로메오 암만나티에게 메디치가의 총애를 빼앗겼다.
죽기 바로 전에 그는 아들 클레멘테와 함께 〈그리스도의 죽음을 애도함 Lamentation over the Dead Christ〉이라는 군상이 있는 자신의 묘비(1554, 피렌체 산타아눈치아타)를 조각했다.
쥴리아노 Statue of Giuliano de'medici
1526 - 34년
대리석, 173cm
피렌체, 성 로렌초 대성당
우리가 고등학교시절 미술시간에, 더 나아가 미대입시를 준비했다면 미술실 혹은 아뜨리에에서 목탄이나 4B연필로 석고 뎃상을 연습할때 제일 많이 그린 석고상이 아그리파, 비너스, 쥴리앙이었다.
그둥에서도 쥴리앙을 제일 많이 그렸다.
그러나 이태리의 정확한 이름은 쥴리아노(Giuliano de'medici)이다.
쥴리아노는 인간의 구원과 육체적인 활동을 표현한 것으로 다비드상에서 보여준 이상화와 발랄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다비드는 정면에서 보면 머리와 주먹이 크게 묘사되고 얼굴도 분노에 찬 그리 아름답지 못한 미소년인데 비해 쥴리아노는 사방에서 요리조리 뜯어 보아도 무척이나 아름답고 잘생긴 미청년이다.
더군다나 신체적 표현상도 모세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그만큼 늠늠하고 건장한 체격을 지녔다.
고대 로마의 장군복을 입고 오른손에 지휘봉을 잡은 자세에서 고개를 왼편으로 돌리고 있다.
그러나 건강한 깊은 우수와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하는데 이는 젊은 나이에 암살당한 그의 비극적인 생애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1516년 3월 19일,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피렌체에서 큰 장례식이 열렸다.
장례식의 주인공은 피렌체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던 메디치 가문의 리더 줄리아노 데 메디치(Giuliano de Medici, 1479~1516)였다. 서른일곱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한 줄리아노는 '위대한' 로렌초 데 메디치의 셋째 아들이자, 당대 로마가톨릭교회의 교황이었던 레오 10세의 친동생이었다.
피렌체의 메디치 궁전에서 시작된 장례 행렬은 메디치 가문의 가족 성당인 산로렌초를 거쳐 도시의 골목골목을 천천히 행진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장으로 몰려드는 바람에 산로렌초 성당에서 압사 사고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을 정도였다.
3년 전에 교황으로 즉위(1513년)한 레오 10세 또한 동생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처음으로 고향을 찾았다. 검은 옷을 차려입은 피렌체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피렌체의 실질적인 영주였던 줄리아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았다.
메디치 가문의 사명, 비르투스당시 피렌체의 문학가이자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동시에 피렌체의 임시 시장이었던 마르첼로 아드리아니(Marchello Adriani)는 줄리아노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례식 추도사에서 피렌체를 이끌고 갈 '탁월한 시민(principes)'인 메디치 가문의 사명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
피렌체 도시국가를 이끌어 가던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이 모두 모인 곳에서, 종교개혁이라는 종교적 위기의 한복판에 놓여 있던 메디치 가문의 교황 레오 10세가 지켜보는 곳에서, 마르첼로는 위기의 순간에 요구되는 진정한 리더의 역할과 사명에 대해 웅변을 토했던 것이다.
마르첼로 아드리아니는 피렌체와 유럽의 가톨릭교회를 이끌고 갈 메디치 가문의 사명을 비르투스(Virtus)의 실천이라고 역설했다. 위기의 시대에 리더에게 요구되는 것은 '비르투스'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비르투스는 덕행 선 가치 순결 등의 다양한 뜻을 가진 영어 단어 버추(Virtue)의 라틴어 어원이다.
메디치 가문의 두 번째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7세(1478~1534)는 미켈란젤로에게 자기 가문의 무덤인 '메디치 영묘'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미켈란젤로는 이미 로마에서 '율리우스 2세의 영묘'를 만들기 위해 고생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것은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선뜻 메디치 가문의 부탁을 들어준다. 그는 산로렌초 성당의 새 성구실에 '메디치 영묘'를 건축하고 1516년에 임종했던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영묘를 직접 제작했다.
물론 미켈란젤로는 줄리아노의 모습을 이상화했다. 고대 로마의 장군 복장을 한 망자(亡者)는 지휘봉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숙고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그는 용기를 통해 성취하는 탁월함의 품격을 가진 리더의 모습으로 조각됐다. 미켈란젤로는 줄리아노 아래에 '낮'과 '밤'의 상징적인 조각 작품을 배치했다.
부엉이와 노인의 얼굴이 포함된 여인상 '밤'은 어둠 속에 얼굴을 묻고 있고 몸을 틀면서 태양을 응시하고 있는 남성의 누드 '낮'이 반대쪽에 배치돼 있다. 이것은 마르첼로 아드리아니가 메디치 가문의 사명을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비유한 것과 연관이 있다.
Chris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