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Art수첩

Toulouse Lautrec (툴루즈 로트랙)

Chris Yoon 2021. 12. 4. 01:49

 

19세기 말 파리 몽마르트, 그곳은 불운한 예술가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들던 파리의 뒷골목이었다.

이 시기에 몽마르트는 인상파라고 불리워진 일군의 화가 군단과 음악가들을 많이 배출해냈다.

그중 르느와르와 로트렉, 드가 등의 화가들이 몽마르트 뒷골목의 싸구려 술집에서 압상트 술을 앞에 놓고

내일 당장 먹을거리와 자신의 예술의 행로에 대해 고민하며 술에 취하고 있었다.

그들과 당시 무명의 음악가였던 에릭 사티도 선술집 라핑아젤에서 피아노 연주를 했고...

 

 

 

 

그리고 그곳에는 한 여인이 있었다.

몽마르트에 모인 모든 예술가들의 유일한 베아트리체-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 1895~1938)이었다.

그녀는 화가들의 모델이었고, 음악가들의 벗이었으며, 모든 예술가들의 뮤즈이기도 했다.

남자들이 군림했던 19세기 말 예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

수잔 발라동은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감을 준 훌륭한 모델이었다.

모네, 르누아르, 로트렉, 드가 등 당대의 유명 화가들은 앞다투어 그녀를 모델로 한 그림들을 남겼다.

 

그중 로트렉은 수잔 발라동과 잦은 스켄들로 좁은 몽마르트 거리를 시끄럽게 만들기도 했다.

수잔 발라동은 로트렉과 결혼하기 위해 자살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들 모두의 모델이자 애인이기도 했지만 특히 로트렉과 음악가 에릭 사티와의 사랑은 각별했다.

로트렉은 그 누구보다 수잔을 많이 그렸다.

르느와르가 그녀의 모습을 아름답게 그렸다면 로트렉은 수잔의 억척스러운 삶을 그대로 그림으로 표현해냈다.

자신이 불구였던 로트렉은 그 누구보다 수잔을 잘 이해했으며 그녀의 예술적 성장을 돕기 위해 애썼다.

훗날 로트렉의 그림 속에 수잔은 결코 아름답지는 않으나 삶의 깊이를 아는 여인으로 표현되어 있다.

 

 

19세기 말 파리 몽마르트, 불운한 예술가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들던 파리의 뒷골목 선술집.

무희들이 춤을 추었고 로트렉은 매일 술에 절어 살았다.

후천성으로 불구가 되어 드가를 선생님으로 여기고, 고흐도 알게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몽마르트의 카페 'Lapin Agile'을 아지트로 삼고
거의 생활을 하다시피 하며 무녀들의 힘들고 지친 삶을 그림으로 많이 담아냈다.

그녀들의 춤추는 모습, 옷을 갈아입고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 막간에 쉬는 모습, 피곤과 술에 취한 모습,

얼룩진 화장에 잠자리에 든 마치 동성애를 나누는듯한 모습,...

그는 몽마르트 뒷골목 무희들을 화폭에 남겨 당시의 술집풍경을 담아냈다.

그의 그림들은 당시 상황의 좋은 자료가 된다.

 

 

 

또한 그는 Graphic Poster를 처음 만들어낸 커머시얼 선두주의 者이기도하다.

그림위에 어찌 lettering을 시도할 생각을 했을까?

지금봐도 고급스럽고 오히려 Classic한 분위기의 장식을 겸한 Poster이다

 

툴루즈 로트렉(1864-1901, Henri Marie Raymond de Toulouse-Lautrec Monfa)이 그린 Poster와

친구 빈센트 봔 고흐의 초상.

 

 

 

'툴루즈 로트랙(Henri de Toulouse Lautrec, 1864-1901)'

툴루즈 로트렉(1864-1901, Henri Marie Raymond de Toulouse-Lautrec Monfa)은 프랑스 알비 Albi 태생으로

귀족 가문 출신입니다. 주요 후기 인상파 화가로, 아트 누에보 일러스트레이터로, 석판화가로 이름을 남겼고

현대 상업 포스터의 시초로 더 폭넓게 알려져 있죠. 에드가 드가(Hilaire Germain Edgar De Gas, 1834-1917)의 영향을

받았고,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93-1944),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1884-1920) 등에게 영향을 준 작가이기도 하다.


로트렉은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근친혼의 영향으로 선천적으로 타고난 여러 질병들을 겪었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유전적 결함으로 키가 자라지 않아

하반신이 과도하게 짧은 난쟁이 형상으로 지팡이에 의존해 살아야만 했다.

부모님도 1촌 사촌지간이었고 그의 동생은 태어난(1867) 이듬해 사망했다.

이후 부모님은 갈라서고 로트렉은 거의 유모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는데 8살 때 엄마와 함께 살기 위해 파리로 떠나면서 연습장에 스케치나 캐리커처를 자주 그렸다. 다행히 그의 재능을 알아본 부모님들은 그에게 가끔씩이라도 미술 수업을 받도록 했다. 그의 초기작에는 (서커스장에서 본) 말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와 관련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툴루즈 로트렉(1864-1901, Henri Marie Raymond de Toulouse-Lautrec Monfa展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