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 kahlo- 그녀는 누구인가?
'고통과 연민의 자화상'의 작가 - 프리다 칼로(Frida Kahlo)
나의 평생소원은 단 세 가지,
디에고와 함께 사는 것,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것,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
내가 미술대학을 다니던 시절엔 기라성같은 예술인들이 지금은 홍대앞 클럽거리로 변한 학교근처에서 주둔을 하면서 제자양성을 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여류작가들도 있었는데 그 대표급들이 천경자씨, 김정숙씨였다.
김정숙 조각가는 오래전에 타계하셨고 천경자님은 미국에서 딸의 간병을 받으며 치매에 시달리고 계시다.
그들은 남자교수님들보다 좀 더 섬세하게 정신적으로 나를 예술가의 영역으로 불러들였다.
홍익대학교에서 바라보이는 합정동 한강노을은 속이 뒤집힐 정도로 붉게 타올랐고 와우산에서 불어오는 아카시아 향기는 불란서의 시인들이 걸렸다는 꽃가루병을 일으킬만 했다.
"예술가란 흘러가는 구름 한 조각, 굴러다니는 돌맹이 하나, 풀 한 포기 마저도 헛되이 봐서는 안되는거야." 김정숙 선생님은 늘 나를 앞에 세워놓고 말씀하셨는데 그때마다 여류작가들의 이름이 하나, 둘... 나오면서 그들의 선과 리듬, 공간에 빠져들게 했다.
그 여류작가들의 작품세계뿐만 아니라 사생활까지 알게되면 더욱 야릇한 흥분에 휩싸였다.
결코 평범치않은 생, 그들의 사랑은 잘못될줄 알면서도 빠져들어가는 파멸을 부르는 사랑이 거의 다였다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의 대표적인 여성 미술가이자 디에고 리베라(1886년~1957년)와의 관계를 통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이다. 리베라와 나눈 예술가로서의 교감, 결혼, 그리고 뒤 이은 불행과 파경은 칼로의 삶에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가져다준 커다란 사건이었고, 이들의 관계는 대중적인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20세기 전반, 멕시코는 서구의 양식과 사조의 유입에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칼로는 멕시코 특유의 화풍을 구축한 대표적인 미술가라는 타이틀로도 인정을 받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로 유명했던 프리다 칼로의 일생은 디에고 리베라라는 유명한 멕시코 거장과의 만남만이 아니라, 칼로가 제작한 약 50여점의 자화상을 통해서 여성작가가 자신의 내면을 고백하고, 새로운 여성성을 회화적으로 구축하는 과정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프랑스(파리)와 미국(뉴욕)에서 1920년대와 1930년대에 풍미했던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분명하게 받고는 있지만, 화풍 상으로는 멕시코의 종교화에서 등장했던 양식과 신화에 바탕을 둔다.
1928년 나이 21세에 첫사랑 알레헨드로와 결별 후 나머지 인생을 친구 사이로 지내며 그 당시 멕시코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쿠바의 공산주의자 훌리오 안토니오 멜라를 알게 되고 그와 함께 살고 있는 티나 모도티와 깊은 우정을 나누며 멕시코 공산당에 입당을 하고 그에 따르는 다양한 행사에 참여하며 그녀의 영원한 예술의 동지이자 연인이요 배우자인 멕시코 화단 불후의 화가 디에고 리베라를 만났다..
다음 해인 1929년 20살 이상의 나이 차이가 나는 42세의 디에고 리베라의 세 번째 부인이 되어 결혼을 하며 화가의 생활을 포기하고 오로지 디에고 리베라에게 헌신한다.
그 당시 그녀의 치료비로 재정적 압박을 받던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결혼을 허락한다.
1930년 그녀의 나이 23세에 첫 번째 아이를 불후의 멕시코의 화가요 대가인 파블로 피카소가 서러울 정도로 여성편력의 끝을 모르는 카사노바 디에고 리베라로부터 첫 아들을 임신 하건만 유년시절의 끔찍한 교통사고의 후유증과 선천성 골반 이상으로 출산을 끝내 못하고 임신중절을 하는 아픔을 겪는다.
때를 같이 하여 디에고 리베라가 멕시코 공산당에서 제명당하고 미국으로 벽화설치를 하기위해 떠나는 길에 그녀 후리다 칼로 역시 함께 공산당을 탈당하고 그녀의 남편인 디에고 리베라의 뒤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다.
1932년 약관 나이에 두번째 임신으로 아들을 출산하여 디에고에게 주고싶어 하나 디에고는 반대하고 바람잘날 없는 바람기는 방종하는 생활과 여성편력에 빠지고 후리다 칼로는 두번째 임신중절을 하고 그녀의 어머니는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깊은 우울증에 빠진다.
1934년 27세에 세번째의 임신중절을 하고 그녀는 남편인 디에고 리베라가 자신의 친정 여동생인 처제 크리스티나와 깊은 관계임을 알게 되고 큰 쇼크에 빠지고 디에고가 좋아하는 전통의상 착용의 포기는 물론 긴 머리도 잘라버린다.
1935년 28세의 나이에 멕시코로 돌아와 일본인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와 사랑에 빠지고 그 사이에 디에고는 처제인 크리스티나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동시에 칼로와 일본인 조각가 사이의 관계를 알게 되며 두사람을 협박하여 갈라 놓고
칼로의 건강은 악화된다.
1937년 그녀 나이 30세에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 부부를 만나게 되고 그를 도와주게 되며 둘은 서로 사랑에 빠지건만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1938년 31세에 그녀는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의 거장 앙드레 브르통을 만난다.
같은 해 11월 뉴욕의 줄리앙 레비 화랑에서 그녀의 첫 개인전을 열게 되고 브르통은 그녀를 뛰어난 초현실주의 화가라고 찬사를 보내고 카사노바 디에고 못지 않게 칼로 역시 남성편력에 있어서 그 못지 않게 새로이 사진작가인 니콜라이 머레이와 사랑에 빠진다.
1939년 32세에 앙드레 브르통의 후원으로 처음으로 파리의 삐에르 콜르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게 되고 피카소, 칸딘스키는 물론 당대의 대가들로부터 극찬을 받고 그녀의 작품이 남미 화가로는 처음으로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되는 영광을 얻는다.
그리고 연인 머레이와 결별하고 디에고와도 이혼을 하게 된다.
1940년 33세에 멕시코 국립미술관에서 개최된 초현실주의 국제대회에 두 점의 작품인 <두 명의 후리다>와 <상처 받은 식탁>을 출품하고 서로 상대의 독립성을 존중한다는 조건을 내걸며 디에고 리베라의 54세의 생일에
재결합을 한다.
1941년 그녀의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는 사망하고 그녀의 건강은 다시 악화되고 코요아칸의 푸른 집에 정착한다.
1944년 37세에 석고와 가죽 코르셋을 착용하것만 그녀의 몸의 균형을 지탱하여 주지 못하고 1946년 39세의 나이에 뉴욕에서 척추수술을 하나 고통은 점점 더하고 결국 그녀는 1950년과 1951년 사이 그녀의 나이 43세와 44세에 영국에서 일곱 번의 척추수술을 받는다.
1953년 그녀는 그녀의 모국 멕시코에서 회고전을 개최하는 데 침대에 실린 채 전시회 개최에 참석하고 전시회가 끝나면서 그녀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고 1954년 6월 2일 반미시위에 참여하고 6월 13일 한 많은 생애에 폐렴으로 한 위대한 세계적인 여류화가는 종지부를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