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Art수첩

Paris, Montmartre의 예술가 이야기 XI - 깨질 것 같이 섬약한 아름다움, Marie Laurencin

Chris Yoon 2021. 12. 2. 04:42

깨질 것 같이 섬약한 아름다움, Marie Laurencin

 

[Marie Laurencin作 The Kiss]

 

 

내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누나의 방에는 참으로 묘한 분위기의 그림이 한 장 걸려 있었다.

베일에 쌓인 듯 한 느낌의 몽환적이고 아련한 분위기.

그 속에 살랑 거리는 여성스러운 움직임이 배어 나오는, 부드럽고 가벼운 솜사탕 같은 그림.

그림 속의 여자들은 기묘하게 아름다웠다. 사람보다는 밀랍인형에 가까운 느낌. 그러나 밀랍인형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따스한 느낌.

손으로 툭, 건드리면 금방 금이 가버릴 것만 같은 섬약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그 그림의 작가는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이었다.

작품을 통해 자신 혹은 다른 사람에게 말해주고 싶은 사랑이야기를 표현하고자 한 불란서의 야수파 여류화가.

 

아폴리네르의 연인으로 흔히 알려져 있으나, 20세기 초 가장 환영받는 파리의 뮤즈였으며, 로댕으로부터‘야수파의 소녀’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던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누나의 한창 나이, 꽃같이 예뿐 모습이었을때, 대문 밖에서 서성이던 낯 선 형들이 많았었다.

누나는 그 형들을 안 만나주고 없다고 하라고 시켰다. 그럴때마다 그 형들은 내게 종이를 접은 편지를 누나에게 전해 달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갑갑한 여자보다 좀 더 가엾은 것은...'이렇게 시작되는 줄줄이 운이 같은 詩는 나중에 알고보니 그 형들이 밤새 베껴 쓴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의 '진정'이라는 詩였다.

오늘은 그녀의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20세기 전반기는 여성이 살아가기 힘든 시절이었다. 이 시기에 대부분의 나라들이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하였지만 과거의 인습이 여전히 남아있던 시절로 여류화가는 손꼽을 정도였다. 이 시기에 부르주아적 여성이미지를 거부하고 화가로서, 문학가로서, 그리고 동성애자로서 당당한 삶을 살아갔고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詩,'진정'의 주인공이기도 한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

그녀의 그림에는 남성이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녀의 화풍은 독보적이고 독창적이며 극도로 단순하고 평면적이며 단적이지만 풍성하고 섬세한 색으로 인해 장식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또한 페미니즘적이고 옅은 담채(옅은 수채화 물감으로 채색하여 연필선이 비치는 그림의 형태)에 아몬드 모양의 검은 눈을 가진 두 여성이 짝을 이루어 표현 된다.

훗날 피카소가 그녀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지만 그녀는 자기 자신만의 화풍으로 개성있게 소화해냈다.

사실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은 화가로서 예술역사에 진한 한줄을 그은 위대한 예술가라기보다 초현실주의, 아방가르드 시인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의 여인이며 큐비스트의 뮤즈로서 더 알려진 인물이 아닐까 생각된다.

주로 소녀나 여인들을 그린 파스텔 색조의 독특한 수채화들로 알려진 이 여성 화가는 자신의 그림만큼이나 독특한 삶을 살았다.

 

그녀는 사생아로 태어났다. 어머니 멜라니-폴린 로랑생은 노르망디 지방의 작은 어촌 출신으로 스무 살 무렵 파리로 상경, 가정부와 식당 종업원을 거쳐 굴곡많은 인생을 산 여성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미 가정이 있으면서 로랑생의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그녀를 낳았고, 숨겨진 여자로 살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부유한 남자로, 유력한 가문의 여자와 결혼한 채 멜라니-폴린과 이중생활을 했다. "숨겨진 여자"가 된 어머니는 고향과의 관계는 물론, 일체의 사회적 관계들을 끊은 채 고독하고 비밀스러운 생활을 영위해야만 했다.

이처럼 남다른 출생과 성장기는 로랑생의 성격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어머니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유럽 문화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19세기와 20세기는 또한 문화예술계의 격변기였다.

선생이 되기를 원했던 어머니의 바램을 뿌리치고 젊은 로랑생은 여류화가의 꿈을 꾸기 시작한다.

다행히 학교에서 만난 스승의 도움으로 파리에서 정식으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욍베르 아카데미로 옮기고 소묘를 배우며 당시 유명했던 마네의 작품에 감동하며 자신만의 화풍을 조금씩 만들어 간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꿨던 마리.

그러나 마리의 본격적인 불행이 시작된다. 독일인 남작과 결혼하고 국적이 독일로 바뀐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대전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마리는 조국 프랑스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전전하게 된다. 물론 결혼생활도 불행했다..

 

그러던 1907년.

당시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바토-라부아르라 (불어로 '세탁선'이라는 뜻)는 곳에 소개 되었고, 그 때 피카소와 막스 자코브 등 전위적인 화가 및 시인들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는 가난했지만 예술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고, 그중에는 아폴리네르라는 시인도 있었다.

당시 아폴리네르는 피카소와 함께 입체파 미학을 창안함으로써 시와 미술을 결부시킨 20세기 모더니즘 예술의 창조자였는데 그 역시 사생아였고, 사생아라는 공감대는 곧바로 두 사람을 사랑의 열병에 빠져들게 한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예술혼을 불어 넣어주는 관계로 5년간 열렬히 사랑하게 된다.

당시 열병처럼 달아오른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자기만의 작품 세계를 영위해 나가며 두 사람 모두의 예술적 재능이 만개한 황금기였다고 볼 수 있다. 마리는 많은 예술가들과 접하면서 감각적이며 유연하고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 형태와 색채의 단순화 속에 자신의 진로를 개척해 나간다.

 

아폴리네르도 마리를 위해 지은 많은 작품이 사랑을 받으며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자리 잡았고, 마리는 그의 영향으로 미술뿐만 아니라 문학에 소질을 보이며 몇 편의 시를 짓기까지 이른다.

하지만 평온하고 아름답기만 한 그들의 사랑은 그리 오래가지를 못한다. 그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둘 다 지독히도 개성이 강했고 너무 자아가 강해서 두 예술가가 택한건 결국 결별이었다.

마리는 그 와중에 열게 된 첫 개인전에서 파리 화단의 지위를 확보하며 더욱 작품에 열정을 쏟는다.

반면, 아폴리네르는 다른 여인들을 수차례 만나고 다니며, 그때마다 마리에게 했듯 많은 시와 연서를 쓴다.

이런 그의 모습에 마리 역시 1914년 독일 남작 오토 폰 바트겐과 결혼을 하기에 이른다.

 

그런데다 불과 한 달여 만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인으로 국적이 바뀐 마리는 자신의 조국인 프랑스로부터 버림받는 어처구니없는 처지가 되고 만다.

전쟁에 참전하게 된 아폴리네르는 새삼 마리의 소중함을 느끼며 그녀를 그리는 시를 써,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 하지만, 이미 결혼을 한 마리는 그 마음을 받아줄 수가 없었다.

마리는 바르셀로나에 거주하면서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된다. 아폴리네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 아폴리네르는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보병 소위로 입대하여 평생 원하던 프랑스 국적을 획득하였으나 1916년에 머리에 파편을 맞아 후송되어 두 번이나 수술을 해야 했고, 허약한 상태에서 스페인 독감에 걸려 종전을 3일 앞두고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아폴리네르의 부고를 들은 마리는 충격을 받고 절망에 빠졌다.

적대국의 남자와 결혼을 해서 전쟁 중에도, 전쟁이 끝난 후에도 조국에 갈수 없었던 7년. 그 고통의 시간을 보낸 후에야 겨우 조국에 돌아오는 것을 허락받게 된 그녀는 1921년 독일인 남편과의 이혼을 결심하며 새 출발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녀의 새 출발은 오랜 부재로 인해 쉬울 리 없었다. 그렇다고 그림에 대한 열정을 그 무엇과도 바꿀 수는 없었다.

끝까지 노력한 마리는 결국 다시 전시회를 개최하며 화단에 꽃을 피우게 된다. 그러면서 1923년, 더욱 그녀만의 화풍을 확립시키며 미묘한 매력의 작품을 만들어 낸다.

 

마리의 작품 중 '사랑의 시도'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그려진 요정적인 유년기의 세계, 그리고 가장 호평을 받았다는 맨스필드의‘원유회’에 그려진 소녀들의 모습...거기에는 그녀가 가질 수 없었던 아이에 대한 집념과 전 생애를 통해 변함이 없었던 소녀시절에 대한 향수가 응축되어 있다.

 

다음해에는 무대 일을 맡게 되었는데 호평이 줄을 잇자, 인테리어 디자인, 무대 예술, 일러스트레이션 등의 응용 미술 분야에 까지 활약의 범위를 넓혀나간다.

 

하지만 그녀의 삶에도 어느새 죽음이 찾아오고 있었다.

미술에의 열정 하나로 부단히 노력해 온 긴 세월. 1956년 6월 72세의 일기로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훗 날, 일설에 의하면 마리가 숨을 거둘 때, 아폴리네르에게서 받은 오래된 편지를 쥐고 있었다고도 한다.

마리 로랑생은 아폴리네르의 뮤즈로 유명한 여자였지만, 알면 알수록 그녀는 단지 누구의 뮤즈, 라고 표현되기에 앞서 자신만의 큰 화가였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화풍을 창조하고 그것을 꿋꿋이 지켰으며, 평생동안 화가로 살아간 여자, 마리 로랑생. 그녀의 그림 속에 담겨있는 여인들은 모두 그녀 자신의 모습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원고를 작성하면서 원고중에 나왔던 두 개의 詩를 올려야 한다는 판단이 확고해 졌다.

그러나... 나는 번역詩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무척 싫어한다.

그들의 정서와 우리의 정서가 차이가 나기도 하겠지만

지난 날 영어공부를 한답시고 형들이 원어로 된 시를 번역하여 크게 암송하는 것을 보고 들었었다.

그 말도 안되는 어색한 문법, 운율...

그러나 어쩌리... 가장 가까운 뜻을 가진 낱말을 총동원하여 옮겨보기로 한다.

 

 

 

 

미라보 다리 (Le Pont Mirabeau) - 기욤 아폴리네르 (Guillaume Apollinaire)

 

 

Sous le pont Mirabeau coule la Seine

Et nos amours
Faut-il qu'il m'en souvienne
La joie venait toujours apres la peine
Vienne la nuit sonne l'heure
Les jours s'en vont je demeure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우리들 사랑도 흘러내린다
내 마음속 깊이 기억하리
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오는 것을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Les mains dans les maines restons face a face
Tandis que sous
Le pont de nos bras passe
Des eternels regards l'onde si lasse
Vienne la nuit sonne l'heure
Les jours s'en vont je demeure

 

손에 손을 맞잡고 얼굴을 마주보자
우리들 팔 아래 다리 밑으로
영원의 눈길을 한 지친 물결이
흐르는 동안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L'amour s'en va comme cette eau courante
L'amours s'en va
Comme la vie est lente
Et comme l'Esperance est violente
Vienne la nuit sonne l'heure
Les jours s'en vont je demeure

 

사랑은 흘러간다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들 사랑도 흘러내린다
인생은 얼마나 지루하고
희망은 얼마나 격렬한가.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Passent les jours et passent les semaines
Ni temps passe
Ni les amours reviennent
Sous le pont Mirabeau coule la Seine
Vienne la nuit sonne l'heure
Les jours s'en vont je demeure

 

나날은 흘러가고 달도 흐르고
지나간 세월도 흘러만 간다
우리들 사랑은 오지 않는데
미라보 다리아래 세느강은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Guillaume Apollinaire

 

 

진정 -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권태로운 여자보다 더 가여운 것은 슬픈 여자입니다

슬픈 여자보다 더 가여운 것은 불행한 여자입니다

불행한 여자보다 더 가여운 것은 병든 여자입니다

병든 여자보다 더 가여운 것은 버려진 여자입니다

버려진 여자보다 더 가여운 것은 쫓겨난 여자입니다

쫓겨난 여자보다 더 가여운 것은 죽은 여자입니다

그리고...

죽은 여자보다 더 가여운 것은 잊혀진 여자입니다

 

 

[Marie Laurencin, 1883-1956]

 

 

로랑생은 자신이 아폴리네르에게 잊혀진 여자가 되어 가장 가여운 여자라고 생각되어 쓴 것일까?

서로가 상처주는 관계가 되어 이별까지 이르고 다른 남자와 경솔하게 결혼해버리기까지 했지만

아폴리네르를 향한 로랑생의 사랑은 아마도 여전하였었나 보다.

 

그러나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 로랑생은 이런 말을 남겼다.

"나를 열광시키는 것은 오직 그림이며,

그림만이 나를 영원토록 괴롭히는 진정한 가치이다."

그녀는 '아폴리네르'가 사랑했던 '잊혀진 여자'이기 이전에 '화가 마리 로랑생'이었다.

 

 

오늘로서 그동안 11회에 걸쳐 올린 'Paris, Montmartre의 예술가 이야기'는 끝맺음을 하겠습니다.

예술가의 인생이란게 파고들면 파고 들수록 극히 정상적이지 못하고

특별한 세상을 살다가 간듯, 명쾌하지 못한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저 또한 대학공부를 미술을 전공했기에 그들의 불행을 가슴 아파하면서도

재빠르게 현실에 타협치 못한점을, 그래서 더욱 곤궁하게 떠밀려 살다간 삶들을 조심스럽게 펼쳤습니다.

그러면서 조금이라도 현실적으로 개인의 뜻을 비추어 쓰다보면 예술가들의 삶에 환상을 품고 좋아했던 분들에게

다소 실망을 안겨드릴까봐 때로는 걱정도 앞섰습니다.

내일 부터는 더욱 밝고 건강한, 그러나 그속에 깃든 애수와 노스탈쟈의 유럽여행기가 펼쳐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