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Art수첩

Paris, Montmartre의 예술가 이야기 X - Modigliani 의 또 다른 Art 世界, 彫刻 (sculpture)

Chris Yoon 2021. 12. 2. 04:30

Amedeo Modigliani의 또 다른 Art世界, 彫刻 (sculpture)

 

Amedeo Clemente Modigliani (1884.7.12 – 1920.1.24)

 

 

'가난하고 몸가짐이 거칠고, 언제나 술에 취해있던 예술가,

술집과 술집 사이를 떠돌며, 이상하게 목이 긴 초상화를 그리고 가난 속에서 죽었고 죽은 후에 더 유명해진 사나이,

이 말은 모두 정말이기도 하고, 동시에 거짓말이기도 하다.'

시인 일리아 에렌부르그의 모딜리아니에 대한 평 이다.

이렇게 해서 전설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전설과도 같은 삶, 신화적 운명... 모딜리아니의 삶에 붙여진 수식어는 참으로 많다.

모딜리아니의 생애는 현대인의 향수로선 뭔지 채워질 수 없는 상징 같은 것은 어쨋든 부인할 수 없다.

일리아 에렌부르그의 적절한 지적처럼 모딜리아니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청춘을 추억하는데 필요한 구실로서' 그의 생애를 유정적으로 재생해 보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몽마르트나 몽빠르나스의 전설을 대부분 파리지앵들에 의한 금세기적인 미술가의 한 유형을 허구한 것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겠는데, 모딜리아니처럼 한 이방인으로서 파리에 살았고, 그와 절친한 사이였던 일리아 에렌부르크는 그의 '예술가의 운명'에서 모딜리아니에 관한 전설을 일면의 진실과 대부분의 허위라고 냉혹하게 증언을 한 적이 있다.

5년 정도 되었나?...

우리나라에서도 일산에 위치한 한 미술관에서 모딜리아니와 그의 연인 쟌느의 기획전이 있었다.

그때 그들의 드라마틱한 만남에서 죽음까지 이슈를 만들어 상업적으로 홍보를 하며 관객몰이에 나섰었다.

이는 크게 성공, 미술관은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며 특히 여성관객들은 절대적인 호응을 보내며 한편의 영화를 보듯 그들의 이야기에 촛점을 맞추며 마치 자신들이 비극의 여주인공, 쟌느가 된양 이태리 남성 모딜리아니의 체취와 정액냄새를 그리워했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그의 작품이 대부분 인물초상화와 Nude에 촛점이 모아지고 말았다는 점이다.

그는 화가이자 조각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조각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조각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그의 조각을 바라보며 오늘 그의 조각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 한다.

그의 그림에 실마리가 된 그의 조각은 그의 예술에 매우 큰 영향력을 미쳤기 때문이다.

 

여인의 두상, 석회석, 높이 65cm 1910년작

 

그의 조각을 이야기하려면 그의 출생부터 이야기 해야 된다.

그는 정열적인 기질을 지닌 유태계 이태리인이었다.
데도라는 애칭으로 불리었던 그는 1884년 7월 12일, 이태리 토스칸 지방의 리부르네에서 아버지 플라니니오 모딜리아니와 어머니 으제니 가르셍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평생 일기를 쓰는 습관이 있던 그의 어머니는 철없는 응석받이 막내아들 모딜리아니에 대해 1895년 일기에서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저애가 자라서 무엇이 될까 생각해봤다. 아마 예술가가 되지 않을까?..."
장작과 석탄을 판매하는 상인이었던 아버지 플라니니오는 우울하고 정이 없는 성격인데다가 여행을 떠나 자주 집을 비우곤 했다.
교황청의 화폐발행에 필요한 구리잡품업자로 유복했던 그의 집안은 유태인의 토지소유를 금지하는 당시의 법을 어기고 포도밭을 샀다가 발각되어 로마에서 쫒겨나 리부르네로 이주한 퇴락한 부르주아였다.
어머니 으제니는 이태리의 문학작품을 영어로 번역하거나 가정교사를 하면서 집안살림을 도왔다.
멘델스존과 스피노자 등 예술과 철학을 좋아하던 이모와 할아버지 덕분에 모딜리아니는 어릴때부터 지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열네살이 되던 해,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로 결심한 모딜리아니는 화가 미켈리의 아틀리에에 다니면서 풍경화와 데생을 익혔다.
화가의 길을 가려는 그의 의지는 열여섯살이 되던 해 폐결핵으로 남부 이태리에 휴양을 떠났던 여행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내 인생이 즐겁게 흘러가는 풍요로운 강물이 되기를 바란다네. 난 지금 내 자신에게서 끝없는 창작의 가능성을 느끼고 있어. 작품을 그리고 싶은 욕구가 솟아오르고 있네. "
1902년. 열아홉살의 청년 모딜리아니는 플로렌치아로 떠난다.
누드 전문 미술학교를 수료한 후 베니스 미술학교로 옮긴 그는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의 "인공낙원" 이라는 작품에 심취해 대마초를 피우며 술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앞서 간 명인의 작품이나 삶 자체에 매력을 느끼고 빠져들면서 자신의 길을 모색하기 마련이듯이 일생동안 마약과 술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모딜리아니의 생활방식도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물론 그림에 필요한 기초교육을 가장 훌륭히 받을수 있었고 미술관과 도시곳곳을 다니면서 이태리의 전통을 몸에 익힌 것도 이 시기였다.
학비를 대주던 삼촌 아마데오 가르셍이 죽자 재정적 어려움이 생겼지만 모딜리아니는 당시 유럽 청년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던 파리로 떠난다.
1906년 파리에 도착한 그는 젊은 화가들이 모여있는 몽마르뜨에 자리를 잡았다.
파리시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몽마르뜨 언덕은 19세기까지는 밀을 빻는 방앗간이 가득 들어차 있던 동네였기 때문에 도시개혁 이후에도 서민적인 풍모를 간직하고 있던 곳이었다.
파리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도록 전망도 좋은데다가 방값도 싸고 카페가 들어차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 때문에 특히 젊은 예술가들에게는 메카나 다름 없는 곳이었다.
여기서 그는 2년 먼저 와 있던 스페인 청년 피카소를 만난다.
모딜리아니는 그의 그룹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진정한 우정 관계는 싹트지 않았다.
모딜리아니는 예술에 관한 토론을 펼치기 보다는 낭만적인 분위기 속에서 술을 마시기를 더 즐겼다.
피카소가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발표함으로써 회화 전통을 무너뜨리고 입체파를 탄생시키는 동안 모딜리아니는 툴루즈 로트렉과 그래피즘을 차례로 거치는 습작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가 잘 웃고 친절한 이태리 미남으로 더 알려져 있던 시기도 바로 이때였다.
여자들은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고 자원해서 모델을 서주었고, 그는 문인과 화가들의 회합장소였던 '라팽 아질'에서 화가 위트리요와 함께 술에 젖어 살기 일수였다. 그리고 그는 단테의 "신곡"을 외우곤 했다.
이름 없는 외국 청년에 불과한 그는 곧 방세가 밀려 하숙에서 쫒겨나 방랑생활을 해야 했다.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을때는 찢어 버리기도 했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생활 때문에 그의 초기 작품은 거의 분실되고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그림그리기를 멀리한 날은 없었다.
그는 1907년에는 살롱 도톤느, 이듬해에는 화가5인전과 앙데팡당전에 차례로 출품하는 의욕을 보였다.
몽마르뜨 언덕의 생활에 피곤을 느낀 모딜리아니는 1909년 이 언덕의 정반대편에 위치한 몽파르나스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아카데미즘을 결별하고 야수파와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는데 여기서 그의 그림을 최초로 수집하기 시작한 의사 알렉산드르 박사를 만난다.
몽파르나스의 시떼 팔기에르에 자리잡은 모딜리아니는 조각에 전념을 시작하게 된다.

어디까지나 그의 최종 목표는 조각이였다.

하지만 그날 그날 한병의 술에 매달리는 그는 석재를 구할 길도 없었고 석재를 구했다 하더라도 돌가루가 그의 약한 폐를 괴롭혔을 것이다.

조각가가 되는 게 꿈이었던 그는 당대의 위대한 조각가 브랑쿠시(루마니아·1876-1957)의 충고에 따라 아프리카 조각을 연구했고 조각가가

되기 위해 열심히 소묘를 했다. 그러나 재능을 인정받지 못하면서 매일 알코올에 의존하게 되고 육체적 피로와 결핵이 그를 덮치고 만다.

소묘만으로는 조각에 대한 열의를 채울 수 없었던 그는 드디어 돌로 조각을 시작한다.

당시 이웃에는 루마니아에서 온 조각가 브랑쿠지가 살고 있었다.
로뎅을 좋아한 그와는 달리 조소(흙을 붙여 나가는 형식)나 석고를 싫어했던 모딜리아니는 돌에 직접 조각을 하는 편을 택했다.

값비싼 돌을 살 수 없었던 그는 때로 공사장에 가서 조각을 했고, 그돌은 결국 회수를 당해 건축자재로 쓰이기도 했다.
주로 두상을 제작한 이 시기의 조각 25점은 1912년 살롱 도톤느에 출품되었다.
아프리카미술에서 영감을 얻은 이 작품들은 다이내믹하지는 않지만 고전적인 간결성을 드러내고 있고 그의 그림에서 볼수있는 긴 얼굴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의 조각은 비평가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채 한 점도 팔리지 않았고, 빵대신 술병을 옆에 두고 작업하던 모딜리아니의 건강은 더욱 나빠졌다.
폐결핵이 심해지자 친구들은 서둘러서 그를 고향 이태리로 보내 휴식을 취하도록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돌을 구해 조각에 몰두했던 그는 작품들을 파리로 운반해 오고 싶어했지만 친구에게서조차 악평을 받자 모두 운하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다시 몽파르나스로 돌아오자 제 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모딜리아니는 폴란드 출신의 화가 수틴과 함께 입영신청을 했지만, 건강때문에 거절을 당했고 그림을 그리는 일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모딜리아니는 다시 그림으로 돌아왔지만, 조각을 해본 경험은 그의 화풍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모딜리아니의 두상 조각이 갖고 있는 특징들, 즉 기다란 목과 코, 단순화한 이목구비와 긴 타원형의 얼굴 윤곽은 곧 그의 그림의 특징이 되었다.

그는 명암의 점진적인 변화를 이용하여 3차원적 입체 효과를 내는 명암법(chiaroscuro)을 제한하거나 거의 쓰지 않고 힘찬 윤곽선과 강렬한 색면들을 통하여 평면적인 형상에 조각과 비슷한 입체감을 주게 되었다.

모딜리아니의 초상화가 독특한 조형세계를 보여주는 것은 명암의 점진적인 변화를 이용해 힘찬 윤곽선과 강렬한 색면들을 활용, 평면적인 형상에 조각과 비슷한 입체감을 주기 때문이다. 또한 모델의 개성을 빈틈없이 잡아내면서도 대상을 단순·보편화 시킨 것은 그의 최종 목표가 조각이었음을 느끼게 한다.


 

작품명 : 두상 / 작품재료 : 석재 조각

 

에스키스 ( esquisse : 조각 작품을 제작하는데 있어서 준비 단계로 작은 점토 덩어리로 간단한 모형을 미리 만들어 보는 것)와 함께 이 조각 작품은 1912~14년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며, 수직으로 길쭉한 코의 선맥과 원통형의 목줄기가 신선한 조형미를 유발시켜 주고 있다.

어딘지 먼 시대로의 환상이 맥박처럼 들려오는 이 두상들은 당시의 파리 미술가들이 심취하기 시작했던 아프리카 원생 미술인 그 충실감과 데포르마숑(변형)을 연상시킨다.

 

 

두상 / 1912 作 2010. 6.14 Paris에서 개최된 크리스티 경매에서

5,200만불(약580억원)에 팔린 그의 조각.

Alimestone best of a woman.

 

 

모딜리아니의 그림이 거의 인물화와 누드였듯 그의 조각의 소재도 모두 사람이다. 그의 초상화는 형태를 왜곡시켰지만, 자신만의 양식이 담긴 인물 속에 모델들의 심리적인 상태를 표현함으로써 오늘날 위대한 화가로 평가받는다. 정면에서 본 모습을 몇 가지 색으로 칠하며 원근이 거의 배제된 배경위에 큰 면으로 구성한 그의 인물화는 얼굴을 가장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화풍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은 조각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모딜리아니의 두상 조각이 갖고 있는 특징들, 즉 기다란 목과 코, 단순화한 이목구비와 긴 타원형의 얼굴 윤곽은 곧 그의 그림의 특징이 되었다. 즉, 인체를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감정을 담기 위해서 독특한 표현을 구사했으며 단순화된 형태와 부드러운 선으로 표현했다. 목의 표현은 길고 가늘게,

모델의 심리 상태는 눈을 통해서 나타냈다. 이런 여인상은 무한한 애수와 관능적인 아름다움으로 애조띤 정서를 느끼게 한다.

 

"그는 그저 어쩔 수 없어서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그가 진짜로 바라는 것은 돌로 조각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소원은 평생 그를 떠나지 않았다." 훗날 찰스 더글라스는 이렇게 술회했다.
그러나 조각은 그의 병약한 체력으론 과중한 노동이었고, 재료비도 너무 비쌌다. 대신에 그는 조각을 위한 밑그림으로 카리아티드 연작을 남겼다.

(caryatid / 고대 그리스의 건축 용어로 여상(女像)으로 된 석주를 뜻한다. 그리스어로는 '카리아티데스'라고도 한다. 에렉티 옹의 여상주가 역사적으로 남아 있는데 통상적으로 착의의 여상으로 되어 있으나, 모딜리아니는 나상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들은 캔버스 위에 유채로 된 에스키스를 보여 주고 있지만 석회암으로 된 조각품도 따로 있다. 카리아티드는 '아틀란티데스(남상주,男像柱)'의 대응의 관계에 있다. 이러한 여상석주는 전설적인 유래가 있다. '카류아이'라는 그리스 마을이 페르샤와 전쟁했을 때 이적 행위를 범했다고 해서 그 마을의 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자들은 노예가 되어 이처럼 공공 건물의 엔태블러처를 떠받치는 중벌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모딜리아니는 이러한 여체상을 각 분절의 특성을 살려서 이처럼 조형적으로 재구성해 보였다.

 

 

그러나 결국 그는 조각가로서의 희망을 버리고 다시 화가로서의 전환기를 맞게된다.
그리고 그는 베아트리스 헤스팅스 라는 여자를 만나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나 런던에 거주하고 있던 그녀는 남편과 이혼한 후 앨리스 모닝이라는 필명으로 런던의 아방가르드 잡지에 기사를 쓰는 기자이자 시인이기도 했다.
어찌보면 모딜리아니를 더욱 술과 마약에 빠져들게 한 장본인일수도 있다.
술을 좋아했던 그녀는 값싸고 독하지 않은 포도주만 마시던 모딜리아니에게 위스키와 진을 가르친 것이다.
폭풍과 같은 2년간의 동거기간 동안 모딜리아니는 늘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베아트리스는 친구들의 비난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베아트리스와 헤어진 후 극도의 생활고에 시달리던 모딜리아니는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옆자리에 앉은 손님들의 얼굴을 그려주고 10프랑(약 1,200원)과 술 한잔을 부탁하곤 했다.
많은 친구들이 그를 사랑했지만 정작 그는 피카소와 시인 막스 자콥만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피카소는 그의 그림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당시의 예술가, 비평가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지며 유파를 형성하고 대화를 즐기던 그와는 달리 모딜리아는 몽파르나스에서도 낭만적인 기질 그대로 떠돌고 있었다.
물론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좋아한 시인 막스 자콥은 "내가 시인임을 모딜리아니에게 증명하기 위해서"라는 시를 써서 헌정하기도 했고, 시인 아폴리네르도 몸소 나서서 작품을 팔아주기도 했다.
모딜리아니가 자신의 그림을 팔기 위해 사교계 인사들에게 자세를 굽히거나 필요에 의한 것이나마 유대관계를 맺었더라면 그렇게 심한 가난에 시달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아무에게도 자신을 설명하지도, 설명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작품의 가치는 사상이 표현되고, 말로 할 수 없거나 해서는 안되는 것에 길을 열어주며 작품 자체의 삶을 위해 작가에게 분리되는 데 있다" 라고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적고 있다.
비록 가난에 시달릴 망정 모딜리아니는 늘 우아하고 관대로운 사람으로도 유명했다.
당시의 몽파르나스는 몽마르뜨르와는 달리 외국인이 많이 찾아오거나 화제거리가 만들어지는 문화의 중심지가 아니었다.
야채나 과일을 파는 손수레가 늘어서 있고, 이제 막 변두리의 풍모를 벗고 화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던 곳이어서 오히려 더 인정이 피어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생활을 연명했던 모딜리아니는 즈보로프스키 라는 폴란드 출신의 그림 중개업자를 만난다.
그는 하루하루 15프랑씩의 생활비를 보태주었고, 이후 두사람의 관계는 고흐와 동생 테오의 관계처럼 지속된다.
이제 예술과 삶을 은밀하게 연결한다는 이상을 추구하던 모딜리아니는 1913년 갤러리 베르트 바일에서 그의 생전 유일의 개인전을 갖게된다.
32점의 누드작품만 전시된 이 전시회는 외설을 이유로 경찰이 찾아와서 작품을 걷어가는 소동도 벌어졌지만 그의 이름이 비로소 대중에게 알려지는 성공을 거두었다.
비록 작품은 2점 밖에 팔리지 않았지만, 그의 누드화는 이전까지의 다른 화가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피곤하고 권태로운 모습의 여인들을 보여줌으로써 주목을 끌었다.
고야나 마네의 누드에서 볼 수 있는 알레고리나 이상적인 여성의 미는 없이 부드럽지만 포기한 듯 내던져진 자세를 지닌데다가 몸전체를 그리지 않고 화면의 여백을 많이 남겨둠으로써 더욱 에로틱한 여운을 풍기는 것이다.
이 해에 모딜리아니와 쟌느 에퓨테른느와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이 시작된다.
그러나 1920년 1월 24일 오전 8시 50분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사망한 그를 따라 임신 9개월의 몸으로 투신함으로써 짧은 이승의 삶보다 긴 영원 속에서 모딜리아니와 함께 있기를 택했던 그녀는 살아서는 그의 최상의 이해자였고, 반려였으며 목숨까지도 바친 여인이었다.

지중해의 뜨거운 햇빛과 고향의 어린시절을 그리워했던 그는 파리의 자선 병원에서 3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며 "카라 이탈리아(그리운 이탈리아) "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대부분 사암으로 만든 그의 독창적인 조각은 모두 합해 25점밖에 남아있질않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조금만 여건이 허락되었더라면 우리는 좀 더 발전한 그의 조각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의 카리아티드를 미루어 볼때 돌로 제작된 조각으로 완성을 했더라면 파리 미술계의 조각은 달라졌으라 여겨진다.

 

그리고 2010. 6.14 Paris에서 개최된 크리스티 경매에서 그의 조각은 5,200만불(약580억원)에 팔렸다.

이 또한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살아생전에는 악평이나 들었던 그의 조각이 사후에 이런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거래되다니...

그는 과연 짐작이나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