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Art수첩

Paris, Montmartre의 예술가 이야기 VII -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와 쟌느 에뷔테론(Jeanne Hebuterne)

Chris Yoon 2021. 12. 2. 03:38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와 쟌느 에뷔테론(Jeanne Hebuterne ) 의 사랑

 

Jeanne Hebuterne (1898~1920) Amedeo Modigliani (1884~1920)

 

 

"지구가 산책하기 좋은 별이라기에 내려왔다가..."

이건 한때 내가 광고계에 몸 담고 있을때 떠돌던 유명한 Copy다.

주로 왕자병에 걸린 사내들의 독백이다. 그러나 정말 별에서 내려온듯한 사내를 나는 알고있다.

마치 70년대의 흑백 이태리영화에서 봤음직한 이마가 정직해보이고 눈이 선량한 대리석 조각같은 사내다.

그 사내, 아마데오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1884~1920)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나는 대학시절에 죽도록 좋아하며 도서관에 들어가 매일 보는 그림이 있었다.

얼굴이 긴 여인이 다 벗은채 침대에 누워있는 그림이었다. 그 그림이 모딜리아니의 그림이라는 것 쯤은 오래전부터 알고있었다.

그러나 그의 국적이나 생김새같은 것은 전혀 몰랐다. 그는 화가이자 조각가였다.

서울예고 시절 서양화를 시작하여 입체적인 공부를 하고싶어 대학전공을 조각으로 정한 나는 그가 더욱 좋아졌다.

그러나 그의 인생이, 그의 사랑이, 아니...그의 모든 삶 자체가 그토록 처절하도록 슬풀줄이야...

 

예술가라고 지칭되는 이들이 한낱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동경을 가져다 주는것은 작품 뒤에 얽혀있는 범상치않은 이야기에 카타르시스를 느끼기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상의 테두리에 꼭꼭 갇혀서 답답하게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보헤미안적 감성과 주체할 수 없는 열정과... 뜨거운 사랑과... 이러한 것들의 절묘한 조화가 이끌어내는 결코 일반적이지 않은, 이질적인 것들이 오히려 예술이라는 이름에 덧붙혀진 자연스러운 특권일테고, 매조히스트적 관조자가 된 그 감상인들은 한 예술가가 살다간 신비와 매력을 범접할수 없는 경외감으로, 혹은 드라마틱한 영화의 장면들처럼 즐길것이다.

 

베르베르의 말처럼 '우리는 언제나 발에서 피어나는 뿌리를 끊고 보리밭을 내려볼수 있는 새가 되고 싶은 소년' 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 따분하게 머리 숙인 관조자들에게 아마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 와 잔 에뷔테른(Jeanne Hebuterne) 의 눈꽃같은 사랑이야기는 충분히 숨어있는 스토리에 열광하는 관중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나는 부탁 한다. 그들의 처절하게 불행했던 삶이 오늘날 우리들이 감상 할 수있는 한장의 명화로 남지 않았냐고...

그래서 조심스럽게 이글들을 옮기며 사뭇 엄숙하게 대해 달라고...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1884~1920)

 

1884년 7월12일 이탈리아 토스카나지방의 리보르노, 명문가 유대인 부모에게서 모딜리아니는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모딜리아니는 지적인 집안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체질이 선천적으로 허약하여 중학교 과정을 채 마치지 못하고 미케리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에 어머니는 어린 모딜리아니를 데리고 유럽 지역으로 미술 여행을 다니며 모딜리아니의 예술적 안목과 감성을 키워준다.

훗날 모딜리아니는 피렌체와 베네치아의 미술학교에서 그림을 배우게 된다.

원래 모딜리아니는 조각가가 되길 희망했다. 그러나 허약한 체질 때문에 조각을 포기하고 회화에만 전념했는데 모딜리아니는 이것을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가난하고 술을 좋아하고 때론 마약에 중독도 되었던 모딜리아니.

그는 훗날 세계 역대 화가 중에서 가장 뛰어난 미남이라는 평을 받으며 고독과 우수에 가득 찬 파리 생활의 표정을 가장 잘 표현한 빼어난 화가로도 인정받는다.

또한 에꼴 드 파리의 전설로도 불린다.

( * 에꼴 드 파리 / 20세기 초 파리에 몰려든 이방인 화가 집단으로, 자신의 개성적인 화풍을 구사한 화가들을 뜻함.)

 

타고난 미남이였던 그는 파리 화단에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지만 자폐적인 성격 때문에 번번이 사랑에 실패를 한다.

가난했고 고독하고 궁핍했던 그는 술과 마약으로 하루 하루를 달랬다.

미소가 없었던 차가운 사람이었지만 사실 그만큼 인간을 좋아했던 화가도 없었다. 다만 그의 휴머니즘은 캔버스에서만 구현되었다.

그는 주로 여인의 초상화와 누드라는 두 가지 주제에만 열중했다.

보통 주변의 이웃이나 창녀들을 모델로 그렸는데, 모딜리아니는 인물의 형태를 왜곡시키는 형식으로 독특한 형태의 인물상을 완성하며 자신의 내면 세계를 화폭에 옮겨놓았다. 이것이 훗날 모딜리아니를 단순한 초상화가가 아닌 위대한 화가로 평가받게 한 근원이된다.

그는 줄곧 초상화를 그렸고 한 장의 초상화를 완성하기 위해서 하루에 1백 장도 넘게 데생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가난한 생활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고 술독에 빠진 생활에서도 벗어나지 못했다.
비 오는 밤, 젖은 몸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다 정신을 잃고 길가에 쓰러진 적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아는 유일한, 죽은 이의 명복을 비는 유대인의 노래를 불렀다.
그의 작품활동도 끝나가고 있었다

 

그의 그림은 전혀 인정을 받지를 못했다. 식당에서 밥 한끼 값도 되지 못했다.

배고픈 모딜리아니가 식당 주인에게 돈이 없어 밥값으로 그림을 그려주자 주인이 화를 내며 국수가락을 그림에 던졌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자신의 얼굴이 기형적으로 보이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테니 식당주인의 반응이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고향을 떠나 파리에 정착했으나 그에게 명성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고, 예술적 성취에 대한 집념과 경제적 안정을 동시에 이룰 수 없고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그는 술집에서 술집으로 전전하며 삶과 건강을 허비해야만 했다.

그의 초상화는 마치 조각으로 표현된 형태와 같이 독특한 세계를 보인다. 그의 회화는 파리시절 초기부터 자연을 있는 그대로 모사하지않고 철저하게 자신의 이념과 상상력에 의해 화면을 구성했었다. 단순한 세잔느의 영향에서 진화한 그의 독창적인 세계가 완성되어가는데 모델의 개성을 빈틈없이 잡아내면서도, 대상을 단순하게 보편화시키는것이 특징이었다. 이것은 사실 그의 최종 목표가 조각가 였다는 것에서 그 이유를 짐작케 한다. 하지만 그의 소망에도 불구하고 매일 술에 매달리는 그는 석재를 구할 길도 없었고 석재를 구했다 하더라도 돌가루가 그의 약한 폐를 괴롭혔을 것이다.

"그는 그저 어쩔 수 없어서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그가 진짜로 바라는 것은 돌로 조각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소원은 평생 그를 떠나지 않았다." 찰스 더글라스 는 훗날 그렇게 회고했다.

 

평생 병약한 육체와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자존심을 팔지않고 예술혼을 불태운 모딜리아니가 그의 인생이 한낱 단순한 삼류 소설로 전락하지 않고 예술성 짙게 사람의 마음을 자극하는 극적인 요소가 된것은 오로지 그의 인생에서 두사림이 있어서이다. 첫번째는 그의 물질적 후원자 '즈보르프스키'였고 두번째는 그가 쉴새없이 보헤미안적 정서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갈등 사이에서 헤매일때 그의 속에 내제된 여린 새순보다 부드러운 심성을 발견하게 해준 영혼의 후원자 '쟌느 에뷔테론' 때문이다.

 

전해지기를 그 당시 유럽의 화가들 중 가장 빼어난 외모를 가져서, 몽마르트나 몽파르나스에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기 때문은 타고난 방랑벽과 폭주 습관등으로 돈은 부족해도 모딜리아니를 위해 기꺼이 헌신해줄 모델들과 염문을 생산하는데는 부족함이 없었다고 한다. 30세에 영국의 여류시인 '베아트리스 헤이팅스'와 교제를 시작했으나 심한 술주정으로 헤어지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시를 공부하기 위해 파리에 온 후원자인 레오폴드 즈보로프스키 부부를 만났다. 즈보르스키는 한눈에 피카소를 능가하는 모딜리아니의 천재성을 알아채고 그의 아파트에서 편하게 거주하도록 하면서 작품을 안정적으로 만들게 하거나 매달 일정액의 후원금을 주는등 아낌없는 후원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모딜리아니는 최초의 안정감속에서 1917년초 몽파르나스의 미술연구소 콜라로시 아카데미에서 데생을 공부하는 19세 소녀, 짙은 갈색의 긴머리가 창백한 얼굴과 대조되어 '코코넛'이란 애칭으로 불리운 '쟌느 에뷔테른'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쟌느 에뷔테른(Jeanne Hebuterne 1898~1920)

1898년 관용적인 카톨릭 신자이자 부르주아적 가정환경에서 태어나 제법 부유하게 자란 잔느는 모딜리아니의 여자로만 조명되기에는 아까운 재능을 간직한 여자였다.

언제나 외톨이였으며 어딘가 묘했지만 눈에 띄게 빛이 나는 아이로 주위 사람들의 마음과 시선을 모았으며 열다섯의 어린 나이에 화가를 꿈꾸며 미술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옷과 장신구를 직접 디자인할 만큼 예술적 재능으로 충만했다. 후에 자기 자신을 모델로 누드화를 그려 화단에 반항을 일으킬 정도로 그림에도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그런 열정도 몽파르나스의 신사인 모딜리아니를 만나면서부터 달라진다.

우리에게 모딜리아니의 수많은 여성들 가운데 그저 한 사람으로서만 회자되어 오던 그녀의 이름이 세간에 알려진 건 불과 15년이 채 안 된다.

2000년 베네치아에서 열린 <모딜리아니와 그의 친구들>이라는 전시회에서였는데 모딜리아니의 사망 후 임신 8개월의 몸으로

그를 따라 자살했던 쟌느의 비극적인 죽음을 카톨릭 집안이었던 그녀의 가족들로 하여금 쟌느의 삶에 대해 오래도록 베일에 싸이게 만드는 이유가 되었다.

모딜리아니에게 가려서 평가절하 되거나 세상의 오해를 우려한 가족들은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녀에 대한 자료와 작품들을 일체 공개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녀의 기묘한 눈빛과 신비한 매력은 모딜리아니의 대표적인 초상화를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고개를 갸우뚱하고 목이 긴 여인, 그녀가 바로 모딜리아니 초상화의 대표적인 인물인 쟌느 에뷔테른이었다.

그녀는 초기에는 거친 붓터치와 강한 색상을 사용해 주로 풍경화나 정물화 작업을 하다가모딜리아니를 만나면서 서로의 예술적 지향이 유사하다는 것을 터득하고 인물화 위주의 작업으로 전환 했다.

당시 예술계에서 금기시되었던 과감한 성적묘사의 셀프누드화로, 사회적 통념에서 벗어나 자신의 그림에 대한 열정을 맘껏 표출한 용감한 여성화가였다. 모딜리아니의 순종적이고 희생적인 여성으로만 알려져 있던 그녀가 사실은 넘치는 예술적 에너지와 자신의 선택에 후회 없이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았던 여성이었던 것이다.

1914년 16세 때 처음 모딜리아니를 만났었고, 18세의 나이에 이미 32세인 모딜리아니의 예술적 재능을 인지하고 존경했던 그녀는 14세 연상의 모딜리아니와 사랑에 빠졌고 죽을 때까지 그의 예술적 동료이자 연인이 되었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와 쟌느 에뷔테론(Jeanne Hebuterne ) 의 만남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딜리아니와 쟌느가 처음 만난 것은 1917년 봄.
그녀는 모딜리아니를 만나는 순간부터 '강력한 사랑의 텔레파시'에 감전되어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게 되는 날까지 4년동안을, 14살이나 차이가 나는 그 한 사람을 위해 헌신적인 사랑으로 함께 했다. 당시 화가지망생이었던 그녀는 많은 가난한 화가들과 교류했는데 그 무렵 파리 화단에서 유명한 일본인 화가 후지타의 모델 역할을 했었다. 모딜리아니는 그 때 33살이었는데 평소 에뷔테른은 그의 그림에 푹 빠져 들었고, 만나자마자 당연한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그녀는 젊고 아름다웠으며 진지하고 지적인 여성으로 강한 성격을 가졌었다고 한다.

녀의 자화상을 보면 화면 구성과 색채감각이 뛰어남을 알 수 있고 모딜리아니와 함께 작업한 몇 점의 스케치도 남아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데생하고 그리는등 예술적 소양 또한 사랑의 감정 못지않게 상당하여 최근 소더비등 유명 예술품 경매장의 작품 경매에서 모딜리아니 못지 않는 가치를 인정받고 있지만, 그녀의 생전에는 오로지 '모딜리아니'에 대한 헌신적 지원자로서 만족한다.

 


그녀는 모딜리아니와 동거하기 전까지 공인회계사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아버지와 엄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이에 비해 모딜이라니는 유태계통 인데다가 방탕한 난봉꾼으로 파리 시내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유난히 쟌느의 조숙한 태도와 반항기,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기묘한 눈빛에 매료된 모딜리아니.
쟌느는 모딜리아니의 작업실에서 때로는 모델로, 때로는 연인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그들은 그랑드 쇼미에르 거리에 있는 아파트 3층에 스튜디오를 차리고 동거하면서 서로 모델이 되어주면서 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러나 다른 모델과는 달리 누드화가로 유명한 모딜리아니가 그녀를 그린 그림에는 누드화가 한 점도 없는 것이 특징이다.

원래 모딜리아니는 술에 취하면 옷을 벗는 노출증 증세가 있었는데 그녀와 동거를 시직한 이후로 그런 악습마저 사라졌다.

행복한 시간 속에서도 겨울에 난로에 장작도 구할 수 없을 만큼 가난은 그들을 지독히 따라다녔다. 하지만, 그런 생활속에서도 모딜리아니는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모딜리아니는 그림을 그리고 있어 춥지 않다고 했고 그런 모딜리아니를 바라보며 모델을 해 주던 쟌느는 옷을 입지 않아도 춥지 않다고 했다. 잠을 잘 때는 추위를 견뎌내기 위해 둘은 꼭 끌어안고 서로의 온기에 기대어 잤다.

 

그 해 12월 모딜리아니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즈보르스키 부부의 후원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하지만 그가 전시한 그림들 중 나체화를 미술관 전면에 배치하는 바람에 이것이 관객의 관심을 크게 끌어 그 소문이 입을 타고 빠르게 퍼지자 파리 경찰서장이 긴급조치를 취해 전시회는 몇 시간 만에 종료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전반적으로 호평을 받았다. 그에게 드디어 서광이 비치는 듯했다.

다음 해 그들은 따듯한 기후를 찾아 프랑스 남부에 있는 니스로 옮겼고 그 해 말에 딸이 태어나 어머니의 이름을 따라 '쟌'이라고 불렀다. 니스에 있으면서 모딜리아니는 레오폴드 즈보로프스키, 후지타 같은 화가들과 함께 그림을 그려 니스를 여행오는 관광객들에게 팔았다. 하지만 너무나 싼 그림값 때문에 수입은 미미할 뿐이었다.

가족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요청했더라면 좀더 편하게 살았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어느 날 친구들이 모딜리아니를 찾아갔을 때, 얼어붙은 아뜨리에에서 그는 침대에 누워 있고 옆에는 임신 9개월째인 아내가 앉아 있었다고 한다. 바닥에는 텅 빈 와인 병과 정어리 통조림이 뒹굴고 있었다.
그는 결핵성 뇌막염으로 쓰러지기 전 "사랑하는.. 사랑하는 이태리여..."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1919년 여름 그들은 파리로 돌아왔고 마침내 파리 화단에서 그가 주목을 받게 되었지만, 그의 주벽은 절제 불능 상태로 발전하여 술을 마신 후 수없이 정신을 잃었다. 또한 중학생때때부터 앓아온 늑막염이 폐렴으로 또 그 폐렴이 그의 절제되지 않은 음주와 생활 습관으로 인해 폐결핵으로 발전되어, 1920년 5월 어느 날 며칠동안 그들의 방에서 소리가 없어 집주인이 들어가 보니 모딜리아니는 임신 9개월째인 쟌 에뷔테른에 손을 잡고 객혈을 하면서 졸도 상태에서 온 몸을 사시처럼 떨면서 계속되는 환상, 환각에 빠져 있었고 이에 놀라 의사를 불렀으나 별 도움이 되지 안은채, 결국 '결핵성 뇌막염'이 악화로 목숨을 잃었다.

 

장례식을 치른후 쟌느의 부모는, 거의 혼절한 상태에 있었던 그녀에게 혹시 또 일어날지 모를 불행한 일을 염려하여 5층 방에서 머물게 했다. 하지만 하루 동안 넋이 나간채 거리를 헤매던 쟌은, 모딜리아니가 사망한지 이틀만에 창문을 열고 투신해서 '영원한 당신의 모델이 되겠어요'라고 모딜리아니와의 약속을 지키듯 죽음을 선택했다. 그때 그녀는 두번째 아기를 임신 중이었다.

모딜리아니가 사망하자 이틀 뒤 8 개월된 둘째 아이를 임신한 체 투신자살한 비련의 연인.
천국에서도 자기 모델이 되어 달라는 14세 연상의 이기적인 남편 부탁에 목숨까지 버리고 남편의 뒤를 따른 여인. 당시 그녀의 나이 22세였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4점의 그림은 흐트러진 책상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샴페인잔과 누워있는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는 한남자, 그리고 스스로를 찔러 모딜리아니와 같은 색깔의 피를 순결한 흰색 블라우스 사이로 내뿜는 한 여인으로 마무리지어 유서처럼 남겨졌다..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모딜리아니 곁에 묻힐 것을 거부했다. 5년이 지나서야 쟌의 오빠가 부모를 설득해서 그녀의 관은 모딜리아니 묘지로 이장되었다. 그녀의 묘비명에는 ‘마침내 그들은 같이 잠들다.’ 그리고 ‘한없는 희생으로 봉사한 동반자’라고 기록되었다.

쟌느의 마지막 소원대로 두 사람은 파리의 묘소에 나란히 묻혔다. 그의 묘소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남아 있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1884년 7월 12일 리보르노(이탈리아)생. 1920년 1월 24일 파리에서 죽다. 이제 바로 영광을 차지하려는 순간에 죽음이 그를 데려가다.

파리에는 세군데 큰 공동묘지가 있는데, 몽마르트 묘지에는 에밀 졸라, 베를리오즈, 드가, 마네,

몽파르나스 묘지에는 생상, 모파상이 잠들어 있다.

그리고 세군데 묘지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페르라세즈 묘지에는 쇼팽, 롯시니, 알퐁스 도데, 마리아 칼라스의 묘가

그리고 불꽃같은 인생을 살다간 화가 모딜리아니와 죽음으로도 갈라 놓지 못한 그의 연인 쟌느가 함께 잠들어 있다.

 

아래 그림들은 모딜리아니가 그린 Nude들이다.

그는 주변의 이웃이나 창녀들을 모델로 그렸는데, 모딜리아니는 인물의 형태를 왜곡시키는 형식으로 독특한 형태의 인물을 그리며 자신의 내면 세계를 화폭에 옮겨놓았다. 이것이 훗날 그를 단순한 초상화가가 아닌 위대한 화가로 평가받게 한 근원이된다.

그러나 누드화가로 유명한 모딜리아니가 쟌느를 모델로 그린 그림에는 누드화가 한 점도 없고 초상화만 있는 것이 특이하다.

남자는 정작 사랑하는 여인만은 모든걸 공개하기를 꺼리고 자신만이 간직하려는 습성이 있나보다.


 

 

 

드물게도 그의 그림에는 인물, Nude화가 주류를 이루고 풍경이나 정물은 드물다.

그가 그린 풍경 'sypress tree and the house (사이프러스 나무와 집)'이다.

나무를 그려도 인물을 그린것처럼 길게 그린 느낌이 비슷하다.

남아있는 그의 풍경화는 3점이 전부라 한다.

 

 

 

 

 

 

 

2010. 6.14 Paris에서 개최된 크리스티 경매에서 5,200만불(약580억원)에 팔린 그의 조각.

A limestone best of a woman.

과연 모딜리아니는 훗날 이런 가격을 상상이나 했을까?...

개인적으로도 무척 욕심이 나는 작품이다.

 

 

 

그가 남긴 자화상.

그의 자화상은 아래 그림외에 연필 스케치를 제외하곤 또 다른 것은 없다.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말처럼 '나는 나를 향해 마주보고 있는 살아있는 인간을 봐야 그림을 그릴 수있다'라고 말했듯이

거울을 보면서 자신을 그리기를 거부 했던 화가였다.

그런 그가 아래 자화상을 남긴건 후대에 무척 다행한 일이다.

연도를 보니 1919년, 그가 떠난 1920년1월 24일 보다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그러나 병색이라곤 찿아 볼 수없이 다른 화가들의 자화상과 사뭇 다르게 오히려 귀공자풍이다.

한 손에는 파렛을 들고 있으나 그의 의상은 마치 자주색 벨벳을 입은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