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밭 - 윤필립
고추밭 윤필립
추석날 형님댁에 가면 고추밭이다
형님도 고추, 나도 고추, 내 자식놈도 고추,
맏조카도 고추, 둘째 조카도 고추, 막내 조카도 고추, 조카 손주도 고추
온통 고추들이다
늙은 고추, 싱싱한 고추, 햇 고추, 시든 고추, 굵은 고추, 애기 고추
고추들은 사라지면서 다시 태어나고 그 가계(家系)를 잇는다
젯상앞에 둘러서서 경건하게 제사를 올리는 고추들을 보면
같은 밭에서 열린 고추답게 어딘가 서로 닮아있다
- 보고드립니다 올해는 새고추가 태어났습니다
모두 조상님들의 은덕입니다
나이든 고추가 술 잔을 올리며 손자의 탄생을 알린다
- 제 자식이 올해 중국에서 돌아와 좋은 회사에 취업을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내가 또 한 잔 술을 올리며 보고를 드리고
내 자식놈은 옆에 두손을 모으고 서있다
제사가 끝나고 음복을 할때도 어딘가 닮은 모양새가 있다
크~ 술맛 좋다
나이든 고추가 호탕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친다
너도 한 잔 해라
나도 중간 고추에게 술 잔을 건넨다
추석이 몇일 남지 않았다
추석때마다 고향을 찾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본다
학생시절부터, 정확히 고등학교 다닐때부터 추석을 모르고 살아왔다
집을 뛰쳐나와 학교를 다니느라 추석을 혼자 지냈고 성년이 되고나서도 집에를 들르지않다가
제사를 형네집에서 지내고부터 형님댁으로 가게됐다
아들아이가 세살무렵부터 형님댁으로 다니며 형식을 갖췄다
맞벌이를 한답시고 당일날 아침에 갔다가 오후가 되기전에 돌아온다
이제는 조카들이 성장을 하고 조카며느리들을 보면서 말썽꾸러기 삼촌의 이미지를 벗고
숙부님, 작은아버님이라는 칭호를 들으며 어른이 되었다
해마다 추석날이면 남자들끼리 모여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내 아들아이와 조카들이 점점 성장을 하면서 사진도 진화했다
윗 사진은 작년에 찍은 사진이다
윗줄 좌로부터 맏조카, 나와 스무살 차이다. 그도 이젠 중년에 들어섰다
그리고 윗줄 가운데가 나, 조카들과 함께 자라며 함께 늙었다
윗줄 우측이 둘째 조카, 제일 고독해 보이고 조금은 어두운 표정의 이태리 배우를 연상시키는데
제일 나를 많이 닮았다. 작년부터 두바이에 가있어서 못 본다. 무척 보고싶다.
아랫줄 좌가 내 아들 J.K.다. 얼굴은 앳되지만 의젓한 모습이 때로는 나보다 어른 스럽다
아랫줄 우측이 막내 조카. 내가 군에 있을때 낳았는데 장가를 들어 벌써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그런데... 오늘 전화를 해보니
올해는 형수가 몸이 아파서 추석을 안쇠기로 했다고 한다
내 아들은 추석때 큰 집에서 먹는 토란국이 먹고싶었는데 못내 서운하다고 한다
추석 5일 동안 나는 무엇을 할까?
복잡하여 여행도 못 떠나겠고,...
올해 추석 고추모임은 무산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