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당나귀와 나타샤 - 백석
나와 당나귀와 나타샤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겨울방학을 앞두고 백석은 아버지가 보내온 편지를 받았다. 12월에 방학이 되면 지체없이 경성으로 올라오라는 편지였다.
“나 혼자 어떻게 경성을 간단 말이오?”
백석은 잠시라도 헤어지기 싫어하는 자야의 마음을 미리 알아채고 있었다. 그들은 매일같이 만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지경이었다.
자야는 백석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달은 싸늘히 비치고 길에 쌓인 눈은 얼어서 발걸음을 옮길 적마다 바작바작 소리를 내며 마음은 허전했다. 그렇게 걸어가는 데 웬 남자가 발걸음 소리를 버적버적 내며 따라왔다.
그리고 별안간,
“자야!” 하고 어깨를 감싸왔다. 백석이었다.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이에요?”하고 짐짓 화가 난 목소리로 물었다.
“기차는 아니 오고, 당신은 혼자 종종걸음으로 달아나고, 바람은 쌩쌩, 달은 휘영청 밝은데 발은 시리고..... 그러니 오늘 밤으로 즉시 돌아오면 이천리가 득이잖아? 그래서 되짚어온 거야!”
백석은 시낭송을 하듯이 대사를 줄줄 엮어나갔다.
이리하여 백석은 기어이 하루를 더 묵고 다음날 아침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함흥을 떠났다.
자야의 『내 사랑 백석』에 따르면 이때 백석은 경성으로 가서 부모의 강요로 장가를 들었다. 그 일 때문에 열흘 후쯤에야 함흥에 돌아왔다고 한다. 백석은 토라진 자야를 위로하면서 만주의 신징新京으로 가서 살자고 제안했다. 그는 모던보이를 자처했지만 뿌리 깊은 봉건적인 관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중일전쟁의 와중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친일의 대열에 속속 합류하고 있었고, 그에게도 시시각각 무언의 압력이 검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백석은 그 탈출구로 만주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만주로 가자는 백석의 제안을 자야는 거부했다. 자야는 혼자 짐을 꾸려 백석 몰래 경성으로 떠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경성 청진동에서 꼭꼭 숨어 지내고 있던 자야에게 어느날 쪽지가 날아들었다. 수소문 끝에 자야의 집을 알아낸 백석이 보낸 것이었다. 몇 달 만에 만난 두 사람은 청진동 집에서 꿈같은 하룻밤을 보냈다. 하지만 백석은 다음 날 출근 때문에 함흥으로 가야 했다. 집을 나서기 전에 백석은 자야에게 누런 미농지봉투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백석이 쓴 시 한 편이 들어 있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였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는 표현은 분명히 문장구조의 인과관계를 무시하는 충돌이거나 모순이다. 가히 연애의 달인답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이 우주에 눈이 내린다니! 그리하여 나는 가난하고, 너는 아름답다는 단순한 형용조차 찬란해진다. 이 시를 비롯해 백석의 시에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다.
신 살구를 잘도 먹드니 눈 오는 아츰
나어린 안해는 첫아들을 낳었다
「적경」 중에서
눈이 오는데
토방에서는 질화로 우에 곱돌탕관에 약이 끓는다
「탕약」 중에서
어두어 오는데 아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중에서
백석은 눈을 시의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풍의 배경으로 자주 활용했다. 그 결과, 눈으로 인해 삶의 고달픔이 드러나는 게 아니라 가난하고 고달픈 삶이 눈 때문에 환하게 빛나는 효과를 얻어냈다.

백석과 자야의 사랑이야기

길상사 전 대연각 주인인 자야, 김영한(金英韓)여사가 백석을 애절하게 사랑한 이야기는 모두 아는 터,
이제부터 세상에서 가장 진부하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한다.
백석의 본명은 '기행'.
1912년 평북 정주 출생으로 1929년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토오꾜오 아오야마(東京靑山) 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
1934년부터 조선일보 기자로 있었으며,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그 母와 아들」이, 1935년에 시 「定州城」이 각각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옴.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고, 그 해 함흥 영생고보 교원으로 전직,
1938년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가 1939년 만주로 이주.
1948년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을 『學風』창간호에 발표하면서 남쪽에 알려진 작품활동을 끝을 맺게 되며, 1987년 창작과비평사에서 『白石詩全集』 (이동순 편)이 간행되면서 분단의 엄혹한 현실 속에 가려져왔던 그의 문학이 일반에 널리 알려짐.

시대가 어려울수록 문학은 꽃 피기 마련인지 일제의 식민지 수탈이 가장 심했던 1930년대에는 유난히 큰 시인이 많이 나왔다.
김기림 김영랑 이육사 유치환 서정주 윤동주…. 그 별들 가운데 시인 백석이 있다.
백석은 1912년 7월 1일 평북 정주군 갈산면에서 태어났다.
백석(白石 또는 白奭)은 필명이고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이다. 18세 되던 1930년 단편소설성 ‘그 모(母)와 아들’이 조선일보신춘문예에 당선됐다.
신문사의 후원으로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 영어사범과에 입학한 그는 1934년 귀국 이후 출판부 기자, 영어교사로 각각 2년씩 일하다 만주로 유랑을 떠난다. ‘자유’를 위해 생계를 버린 것이다.
뛰어난 기억력과 영어 실력을 가졌던 ‘모던보이’ 백석은 온갖 밑바닥 일을 전전하다 광복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분단과 함께 남쪽에서는 잊혀진 사람이 되었다. 모호했던 그의 행적은 최근에야 1995년 83세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일성대학 강사를 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그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게 김영한(金英韓·1916∼1999) 여사와의 러브 스토리다. 그녀는 자신이 운영했던 서울 성북구 성북동의 요정 대원각을 보시해 길상사를 만들게 한 주인공이다.
백석시인은 영어교사 시절 기방에서 그녀를 만났고 일본에서 공부까지 한 신여성이던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 부모의 강권으로 다른 처녀와 두 차례나 결혼식을 올렸지만 그때마다 며칠을 못 채우고 애인 자야에게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는 식민지 시민의 자의식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편으로 모국어와 방언에 집착했다. ‘토속적이면서도 친근하고, 감각적인 시세계’라는 게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다.
이제부터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의 시인으로 알려진 백석과 그의 애인 김자야와의 눈물나는 기막힌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 둘의 사랑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김자야님의 이야기를 먼저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자야.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출생.
김자야님은 일찍 부친을 병으로 잃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1910년대에 성장했으니까 그때 당시 일제가 강점하고 있던 시기이고 조선 사람들은 어떤 사업에도 손을 댈 수가 없었지만 유일하게 몰두 할 수 있는 길이라곤 금광업 밖에는 없었다.
1918년 당시 금광 채굴이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그 광산가의 바람은 결국 자야님의 집에도 불어닥쳐 할머니의 친척분이 찾아와 사정하는 바람에 집문서를 빌려주어 가정이 파산되었다.
그 전 까지는 훈장선생님을 두고 살 정도로 여유로웠지만 친척으로 인해 집이 망해버리자 자야님도 중학교를 중단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둘째언니의 동창(여창 가곡의 명인)김수정 언니를 만난다.
그 언니는 집이 가난해서 일찍부터 기생의 길로 나가고 있었던 차 그 뒤로 집안도 넉넉해지고 부모님도 편안하게 모시는 걸 본 자야님은 수정언니를 졸라 따라가게 된다. 그리고 금하 하규일 선생님의 수제자가 된다. 그때 나이 16세였다.
가난을 벗어보려고 찾아갔던 그곳은 기생으로서 갖추어야할 예의와 무가, 창, 맵시등의 호된 훈련을 시키는 곳이었다.
자야님은 남다르게 맵시나 창솜씨가 뛰어나 금하선생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으나 조금도 즐겁지 않았고 오직 가슴속에는 어떻게 공부를 더 할 수 없을까하는 일념뿐이었다.
그래서 한때 중학교를 중단하고 이모를 따라 안동여고에 입학해서 학업을 계속할 때 뛰어난 실력으로 조선어연구회에서 관심을 보였었는데 그후 해관 신윤국선생님의 도움으로 기생을 그만두고 일본유학을 가게된다. 그때 나이20세였다.
유학중에 연희전문 최순주교수님이 찾아와 ‘해관선생님과 우리 몇 사람이 자야님을 하와이로 유학을 보내어서 장차 조선의 여성 일꾼을 만들고자 의논중이라며 이곳에서 공부는 잘 되는지' 답습까지 올 정도라면 감히 자야님의 학문도 높이 칭송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 무렵 서울에서 소식이 단절되며 귀국하게 된다.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일본인에 의해 구속되었으며 해관선생님과의 면회마져 중단되자 선생님을 만나기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다시 기생이된다.
기생이 되어야 커다란 연회에 참석 할 수 있었고 또한 함흥 법조계의 유력한 인사를 만나서 특별 면회를 부탁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후 해관선생님은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함흥관을 나가게 된 첫날밤.
서울에서 함흥 땅으로 부임해와 있는 멋쟁이 시인 백석을 만나게 된다.
영생고보의 어느 교사 송별회였다.
단 한번 부딪힌 한순간의 섬광이 바로 두사람의 영원한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백석은 첫 대면에 자야를 자기 옆으로 와서 앉으라고했고, 마신 술잔을 건네면서 손목을 잡고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마누라야. 죽기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을 것이요.’라고 했다.
그는 다시 손을 잡으며 ‘마누라, 마누라.’라고 불렀으며 밤이 지날세라 ‘오늘부터 마누라 뜻대로 내몸을 맡아 주어야 해요.’라고했다. 자야님은 그날밤 파격적인 충격과 애원에 깊은 늪속으로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때 나이22세였다.
그때 백석은26세였고 동경에서 영문과를 졸업한 준재였고, 이미 [사슴]이라는 시집을 발간한 신인 시인이었고, 19세에 이미 단편소설[그 모와 아들]로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으며 [조선일보]기자로, 잡지[여성]의 편집장으로 있었다.
학교의 축구교사를 전담할 만큼 스포츠에도 능했으며 이국적인 곱슬머리에 미목이 수려하며, 그야말로 ‘모던보이’로 불리우는 청년이었다.
자야는 백석 시인이 지어준 아호였으며 22세의 어여쁜 기생이었다.
그때의 기생이란 가무를 갖추고, 예의범절 행실이 단정하여, 사교계에서 이른바 ‘해어화’ 즉 ‘말귀를 잘 알아듣는 꽃’이라고까지 할 정도로 재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대화도 능숙하고, 예능까지 갖추었다 하여 세상에서 그렇게 칭했다.
그 무렵 자야님은 파인 김동환으로부터 수필제의를 받아 [눈오는 밤]이라는 수필을 썼고 그해 친정 어머니는 결핵으로 사망한다.
이렇게 문학 기생으로 세인들의 주목을 받는 특이한 존재였다.
둘은 함흥의 같은 마을에서 각각 하숙을 하며 깊은 사랑에 빠졌다.
영생고보에 재임하시던 백석은 5만밖에 안되는 함흥에서는 좀처럼 보기드문 멋쟁이었고, 학생들은 그를 ‘모던보이’라고 칭송했다.
2학년 담임을 맡은 3일후 출석부없이 50명을 호명하여 학생들은 신기한 존재에 포로가 되었다고한다.
영어는 반드시 외어오게 하여 뒷날 꼭 시험을 보았다.
학교 축구부 지도를 맡았고 공차는 실력은 수준급이었고 러시아인과의 대화도 거뜬히 해냈다고 월간[현대시]에 나와 있다.
백석은 자야를 바다같이 생각하고, 바다처럼 넓고도 깊은 마음으로 사랑했다.
겨울방학이 되자 고향에서 오라는 아버지의 전갈을 받고 기차를 타고 가다가 다시 자야품으로 돌아올만큼 애지중지 여겼으며 고향에 내려가서도 신문이 배달되듯 편지를 자야님께 써서 보냈다한다.
백석은 고향에서 부모님이 정해준 여자와 첫날밤을 보냈으나 손 한번 잡지 않고 도망쳐나와 만주로 도피성 이주를 간다.
‘마누라, 이 연약한 손으로 그토록 추운 만주땅에 가서 어떻게 나의 와이셔츠를 빨고 고생하지?’하며 깊은 포옹을 했다고 한다.
그 당시 관습에 젖은 부모님은 자유결혼을 완강히 반대할뿐아니라 더군다나 기생출신으로서는 결혼도 할 수 없었다.
자야님은 그의 입신과 출세를 가로막고 흠집을 남길까 두려워 몰래 서울로 도망쳐 홀로서기를 결심한다.
그리고 훌쩍 떠나온 그 녀 앞에 백석은 다시 우뚝 나타나 변함없는 미소와 도량으로그 녀를 감격시킨다. 그 녀를 데리고 함흥으로 가는 기차안에서 흰 봉투를 건네준다.
그 속에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적혀있었다.
그야말로 백석은 연애 철학자이다.
아무도 없는 깊은 산속 오두막에서 세상의 더러운 신분같은 건 다 버리고 오두막에서 둘만이 살고자했던 사랑은 우리들을 시샘나게 한다.
이렇게 서울에 와 있는 자야를 잃을까봐 영생고보를 그만두고 자야품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조선일보사에 근무한다.
그리고 서울 청진동 뒷골목에 살림을 차리고 그녀와 살던집에 의미부여를 하여 시를 짓고, 그녀가 사다준 넥타이에 의미부여를 하여 시를 지었다. 백석은 그녀 앞에서는 익살꾼이었고, 젠틀맨이었고,사랑의 열정가였다.
또한 푸줏간을 지나갈때면 시뻘건 날고기 덩어리들을 쳐다볼 수 없어 돌아 다녔으며, 친구와 악수만해도 손을 씻고 손님이 왔다가면 문고리를 잡고 나서도 손을 씻을만큼 결백증이 심했다고 한다.
자야님이 화를 낼때면 깊은 포옹으로 늘 진한 키스를 퍼부어 대화를 대신하며 그것이 서로의 의사전달이라고 했다.
그의 성격은 남을 비평, 결함에 대해서는 입에 담지도 않고 그야말로 관대함이 큰 장점이었다.
술을 좋아는 했으나 마구 마시는 경음가는 아니었고 오히려 조금 마시는 애주가였다.
항상 손에서 책을 놓는 법이 없었고 책을 읽을때는 자야님의 손을 꼭 잡고 읽었으며 잠이들면 팔을 괴어 2,3시간 저린 팔을 참았다고 한다.
목소리는 부드럽고 다정하며 개방적이며 넉넉함과 따뜻함으로 늘 관대했다.
어떤 경우에라도 화를 내지 않았고 책망도 하지 않았고 우스게소리로 스스로 깨닫게 했다.
둘이 산책을 다녔으며 영화를 보았으며, 한강변의 낙조를 함께 보았다.
자야와 사는 동안 백석은 부모님의 만류에 3번이나 결혼을 했으나 3번다 식만 올리고 도망쳐와 ‘여보, 당신 생각으로 여자들의 손은 단 한번도 잡지 않았어.’라고 실토했다고 한다.
그 당시 자야님은 백석의 부모님으로부터 시달려서 방황을 하고 백석 또한 봉건적인 관습 때문에 고민하며 무언의 반항을 보이기 위해 머나먼 이국땅 북만주 황야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백석은 함께 가기를 원했지만 자야님은 떨어져 있는 동안 잡음도 가라앉히고, 노여운 부모님으로부터 잠시 무관심해 질때까지 홀로 지내다가 다시 만나 가정을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남과 북의 땅덩이는 허리가 잘려 두 사람을 마치 갈라놓기라도 한것처럼 소식조차 확인할 수 없는 38선이 생기고 말았다. 이것이 백석님과의 짧은 사랑이자 긴 이별이다.
해방후 백석과 함께 북만주에서 하숙을 같이한 송지영씨를 통해 들은 백석의 행적은 신경에서 무슨 관청을 다니다 창씨개명을 하라는 일본인의 말에 사표를내고 그 후 많은 고생을 겪었을 것이라 한다.
인편에 한복 바지 저고리와 검정두루마기 한 벌을 보냈는데 송지영씨 말에 의하면 그 옷만 입고 다녔다고 한다.
자야님은 늘 꿈속에서 백석을 만났다한다.
‘평양에서 나를 찾으니 가서 일을 보고 오리다. 북조선에서 나를 스파이로 몰아서 체포령이 떨어졌으니 나를 어디든 좋으니 안전한 곳에 좀 숨겨주오. 당신 옆에 누가 혹시 없소?
여보,나 지금 배가 몹시 고프니 아무거나 먹을 것을 좀 빨리 줘요. 이거 어디 허기가져서 살 수가 있나,‘
늘 꿈속에서 굶주려하는 모습으로 왔다가 살며시 가 버리는 백석 시인, 자야님은 시집이라도 안아보고 싶은 생각에 국립도서관까지 갔으나 대출이 금지된 시집이라 시집만 안고 통곡했다고 한다.
한때 월북시인이라 하여 사회적 비난도 받았으나 당치도 않은 말이다.
문학평론가 백철 선생은 재북시인임을 피력하고 있다.
분단의 혼란속에서 북의 이념을 선택하여 올라간 시인이 월북 시인이다.
그러나 백석은 만주에서 살다가 해방이 되자 고향인 평안도 정주로 내려와 살게 되었을 뿐이다.
1991년 음력 7월1일,백석의 80세 생일날 아침.
당신의 나이26세,
내 나이 22세
우리들의 청춘은 이제 뜨거운 눈물에 젖어 푹푹 한숨되어 나린다.
연연한 사랑만은 영원하건만 신의 질투인가.
이별이 찾아와 우리는 어이없는 남과북으로 나뉘어
26세의 사진만을 놓고 갖가지 원한으로 말없이 타오르는 한 자루의 향심만이
저 혼자서 쇠리 쇠리 꺼져갑니다.
이제 머지않아 빈손으로 돌아갈 때
당신의 순정이 그대로 서려있는 정열의 시 한 수 들고 저승길 갈 날 기다립니다.
흰 당나귀타고 당신곁으로 떠나가는 자야
영광스럽기만 합니다.
시인이란 글을 잘 쓰는것도 중요하지만, 정신이 시인다워야 진정 아름다운 시인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