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애송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 석

Chris Yoon 2021. 10. 12. 07:43

2014. 1. 20.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 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겨울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 마가리 : 오막살이
□ 고조곤히 : 고요히, 소리없이




백석(白石, 1912년 7월1일 ~1996년 1월)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시인이자 소설가, 번역문학가.

본명은 백기행(白夔行)이며 본관은 수원(水原)이다.

평안북도 정주 출생으로 1934년 5월 16일자 《조선일보》에 산문〈이설(耳說) 귀ㅅ고리>를 발표하는 것을 시작으로 작가와 번역가로서의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 1월 20일에는 그간 《조선일보》와 《조광》(朝光)에 발표한 7편의 시에, 새로 선보이는 26편의 시를 보태어 시집《사슴》을 당시 경성부 통의동(通義洞)에서 자비로 100권 출간했다.

이후 1948년 《학풍》(學風) 창간호(10월호)에 일제강점기 중 마지막 시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을 내놓기까지 60여 편의 시를 여러 잡지와 신문, 시선집 등에 발표했으나 정작 시인 자신은 《사슴》 외에는 시집을 더 이상 출간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작품에 평안도 방언을 비롯하여 여러 지방의 사투리와 고어를 사용했으며 1948년 이후 많은 활동을 하지 못했다.

백석은 당시의 조선 땅(오늘날의 남북한)과 만주 일대를 유랑하며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시는 한민족의 공동체적 친근성에 기반을 두었고 작품의 도처에는 고향의 부재에 대한 상실감이 담겨 있다.

남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시인이라는 이유로 백석 시의 출판이 금지되었으나 1987년 월북작가 해금 조치 이후로 백석의 많은 작품들이 활발히 소개되고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주목받고 평가되고 있다.

특유의 평북 사투리와 사라져가는 옛것을 소재로 삼아 특유의 향토주의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뚜렷한 자기 관조로 한국 모더니즘의 또다른 측면을 개척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1964년경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한때 남한과 일본에 알려져 있었으나, 1995년말까지
생존해 있었다는 사실이 최근 유족을 통해 알려졌다

1988년 북한 작가 해금조치가 내려지기 전에는 월북 작가 백석과 그의 시 세계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었다.
그의 모더니즘은 그때까지 알고 있던 한국 시인들의 시와 전혀 달랐다.

현실 너머의 초월적 세계를 그리거나 도시 문명을 그리거나 내면 천착을 시도하는 종전의 시와 달리,
백석은 '삶의 한복판'을 그리고 있었다.
다른 시인들은 주로 어투에서 활용하던 방언을 백석은 사물을 지칭하는 데 썼다.
생소한 방언이 정신없이 열거되는 시적 진술은 다른 곳에서 찾기 힘든 신비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백석은 이제 유명해졌다. 관련 저서와 논문, 에세이 등 이제껏 백석을 다룬 연구물이 800편 넘게 나와있다.
백석의 시어들은 단순히 언어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지켜나가야 할 어떤 가치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보존하고 음미해나갈 필요가 있다.

사랑은 시의 자양분이다. 백석의 절창도 그를 스쳐간 아프고 애틋한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당대 인기가 컸던 '모던 보이' 백석은 많은 여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노천명(1912~57)과 최정희(1906~90) 등 당대 주요 여류 문인들도 백석에 대한 애정을 작품으로 표현할 정도였다.
요정 대원각의 주인으로 법정 스님에게 길상사를 기부한 김영한(1916~99)씨와의 사랑이야기도 회자된다.
사내의 외모가 출중하면 여자들이 끊임없는 법. 현대의 시각으로도 꽃미남에 속하는 백석은 사랑에 끊임없었다
실연의 충격에 허우적대던 백석은 1936년 함흥 영생여고보 회식에서 만난 김영한씨와 사랑에 빠진다.
백석은 김씨를 '자야'라 부르며 서울 청진동에서 잠시 동거하기도 했지만 39년 백석이 만주로 떠나며 헤어진다.
그후, 길상사의 전생 대원각의 주인이 된 기생 진향이, 김영한보살은 백석 시인과의사랑을 공덕비 한켠에 "나와 나타샤의 흰 당나귀" 라는 시로 위로 받으며 속세의 옛애인을 그리워 하면서 극구 사양했다는 법정스님에게 대원각을 기부했다. 현재 성북동에 있는 대원각은 길상사 절로 존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