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강남 1970 >을 보고나서
강남 개발의 이면사,
그 안에서 몸부림 치던 두 형제의 질퍽했던 이야기
1970 강남
서울토박이가 아닌 이상 강남에서 살고있는 주민들에겐 지금 살고있는 그곳의 30년 전 모습이상상이 안될 것이다.
설사 토박이라 해도 그때 당시 지금의 강남에서 살고 있다는건 땅뙈기를 일궈먹고 살거나 양아치라고 불리던 넝마꾼이라는 이야기니 짐짓 모른 척 할지도 모르겠다.
좀 심하게 들리겠지만 그때는 그랬다. 돈 좀 만지는 사람들은 강북에서 살지 결코 강 건너 강남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시절이고 그때 강남은 논밭에 배 밭, 뽕 밭 일색이었다. 그 흔적들은 지금 남아있는 지명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수역, 잠원동, 잠실등이 그렇다.
그랬던 곳이 지금은 부호들의 상징이 되었으니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따로 없다.
1970년대의 강남 삼성동일대의 테헤란로 사진이다
상단에 11시 방향에서 9시 방향으로 굽이쳐 흐르는 큰 물줄기가 한강이고 바로 그 아래 쪽 9시에서 3시방향으로 흐르는 작은 물줄기가 탄천이다.
12시방향에서 6시방향으로 곧게 난 공사구간이 테헤란로이고 좌측 9시방향의 숲이 선정릉, 3시방향의 나즈막한 산이 대치동이다. 고개가 꽤 높아서 한티골이라고 불리웠다.
한강 오른쪽으로 평야지대처럼 보이는 곳이 지금의 종합운동장, 지대가 낮아서 홍수로 한강물이 범람하면 물이 꽤 깊이까지 들어왔던 곳이다.
이미 언급한 양아치라는 말은 남들이 버린 넝마를 주워 생계를 잇는 하층민을 일컫는 말이다.
당시 4대문을 중심으로 한 강북에서 나가는 것들 중에 사람이 죽으면 서대문으로 나가고 분뇨는 왕십리 밖으로 나가는데 강남은 아무 것도 버릴만한 게 없다고 했을 정도였고 60년대 초만 해도 수도 서울 영역도 아니었다.
일제 시대부터 공업지역으로 어느 정도 사람들이 몰려 살았던 영등포를 제외하고 그 서쪽은 김포군, 영등포 동쪽은 광주군에 속했으니 강남이라는 단어의 원조 격인 영동(永東)은 그저 영등포의 동쪽이라는 의미였다
* 윗 사진은 1970년 강남의 원조격인 영동(永東). 당시엔 허허 벌판이었다
하나, 둘... 저렇게 벽돌2층집들이 들어서더니 이윽고 A.I.D. 아파트가 들어섰다
이랬던 곳이 갑자기 개발이 되고 사람들이 몰려 들게 된 바탕엔 정치적 논리가 숨어있다
1960년대 후반 박정희의 정치적 토대는 그다지 탄탄한 편은 아니었다. 그 자신이 쿠데타로 권력을 빼았아 대통령 자리에 올랐기에 늘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당시 야당의 정치인들이 야심차게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안절부절하는 상황이었다. 국력이 전보다많이 좋아졌다고는 할 수 있지만 여전히 보릿고개를 걱정해야 할 판국과 대선을 코앞에 둔 형편에 그는 모종의 방법을 강구한다.
바로 강남 개발이었다. 겉으로는 북한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제2의 서울 개발이라는 명목을 달고 있지만 불모의 땅이라 여겨지던 그곳의 땅을 매입하고 대규모 개발 계획을 발표하면 땅 값이 오를테고 그 후엔 민간에게 되팔거나 혹은 불하의 대가로 기대수익을 챙기겠다는 속셈이었다.
나라가 나서서 은밀한 투기를 조장한 셈이니 그렇게 만들어진 자금을 바탕으로 그들은 자신들만의유신도 밀어붙일 수 있는 여력을 갖게 되었다. 물론 굴지의 건설회사 다수는 이때부터 몸짓을 불려나간 계기도 되었다.
정경유착의 시발이었다.강남은 이렇게 욕망의 땅이 되었다
사진설명 :: 지금은 富의 상징으로 알려진 강남 압구정 현대아파트 앞.
1970년대만해도 한 쪽에서는 초호화 아파트가 생겨나고 또 한 쪽에서는 쟁기로 논을 갈아엎는 진풍경을 볼 수 있었다
유하 감독의 <1970 강남>
영화 강남 1970은 바로 이런 시대상을 재현하고 그안에서 부나방처럼 훨훨 타올랐던 민초들의삶을 조명한다.
그동안 유독 강남에 몰입하며 영화를 만들어 왔던 유하감독의 강남 3부작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말죽거리 잔혹사)이라 할 수 있는데 주인공인 두 의형제의 이야기 말고도그 당시 정치권력에 의해 자행된 음모와 술수, 그리고 배신과 토사구팽이라는 수순까지 적절하게담아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너지가 넘치다 못해 스크린 밖으로 뚫고 나올 정도로 타격감이 예사롭지 않은데 다 보면 기진맥진 해질 것이다.
중반부엔 이 영화가 느와르 쟝를였었나 싶을 정도로 잔인한 장면들이 속출하고 남녀의 거친 성행위도 불사하는데 그런 장치들은 그 당시의 시대상을 또한 반영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그 사이를 위태롭게 지나간다
유하 감독의 <1970 강남>
마치 긴 터널을 지나온 기분이 들었다.
해방둥이라는 딱지를 달고 같은 고아원 출신의 두 의형제, 불도 들어오지 않는 판자집에서 기거하며 양아치라는 소리를 듣던 그들에게 자신들의 주먹은 신세계를 맛보게 했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그들이 내세울 건 그저 주먹질이었다.남들보다 한 족장은 긴 체구에 압도적인 눈빛만으로도 형님과 아우를 만들어 버리는 포스, 그러나 세상이 그들에게 요구하는 건 그런것 만이 아니었다.
깡패와 개발용역으로 살아야 했던 그들에게 희망이란 가져 보지 못했던 돈과 땅에 대한 집착이었고 그러기 위해선 자신을 거둬준 보스에 대한 충심도 필요했다.
김종대(이민호 분)라는 캐릭터는 의형제와 의사(擬似)부자관계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로 나온다.
의지할 곳 없는 그가 정을 붙이고 사는 곳,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음에도 자기 집이라 칭하고 연정을품고있는 여인을 향해서도 그런 내색조차 하지 않았던 걸 그는 땅을 품에 넣는 것으로 대신한 셈이다.
형 뻘인 백용기(길래원 분)가 전 세대가 그랬듯, 이권 다툼에 관심을 갖고 조폭 흉내를 내는 것과는차별되는 부분이다
우연한 계기로 엇갈린 길을 걷던 형제는 당시 강남 개발과 맞물려 이권 다툼에 혈안이 되었던 조직들과 어울리게 되고 살기 위해 주먹질을 하고 심지어 살인을 일삼게 된다. 죽이지 않으면 언제라도 린치를 당할 수 밖에 없던 시절, 그래도 다시 만난 형과 아우는 늘 함께할거라 믿었지만 세상은 그 두 사람을 형제애로 묶어 두는 데 인색했다.
두 남자의 육박전에 가까운 혈투도 따지고 보면 상류상회의 일원이 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이미 위에 있던 자들을 끌어 내리는 과정은 험난하고도 질퍽했다.
그 와중에 지켜야 할 사람이 생겼고 본의 아니게 해를 끼쳐야 하는 사람도 생겼다.
진심을 설명할 겨를도 없었다. 그때는 다들 그렇게 살았다.
영화의 엔딩 즈음, 논밭이던 강남에 마천루가 올라가고 부의 상징이 된 지금의 모습이 부감 된다.
그 과정에서 스러져 간 수많은 혼령들은 그걸 보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 땅에서 돈을 만들어 잘 살았을 또 누군가를 생각하며 강한 놈이 살아 남는게 아니라 살아 남는 놈이 강한 놈이라는걸 깨닫게 한다.
- 양진석의 씨네 필 소울서 가져온 글 -
마지막으로 한 장의 사진을 더 소개하겠다
윗 사진은 강남 코액스 마즌편 대치동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나는 이길과 인연이 깊다. 훗날에는 직장이 이 근방에 있어서 매일 점심시간이면 이길을 걸어서 작은 레스토랑에 들려맛난 음식과 포도주를 사먹고 조금 취하면 그 넓은 길을 걸어 삼성역까지 걸어 나왔다 다시 돌아가곤 했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왕복 14차선 답게 넓은 길이지만 지금은 그 넓은길도 러시아워로 붐빈다
나는 당시 한창 멋을 부리는 아트디랙터로 남들이 미처 생각지도 못하는 영역, 즉모든 사람들이 물질문명을 만들어놓고 떠난 지구에 나와 여자 둘이서만 존재한다는 생각을가지고 그때는 텅 빈 코액스 앞길에 모델을 홀로 세워놓고 사진을 찍었다. 그런식으로 6장을 시리즈로 찍었는데 발표를 하자마자 대기업에서 카렌다용으로 사겠다는 제의가 들어왔었다.
강남 개발의 이면사,
그 안에서 몸부림 치던 두 형제의 질퍽했던 이야기
1970 강남에서의 주제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