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내 XI. XII. XIII. XIV.
그 사내 11.
그 사내,
길게 들어오는 햇빛을 보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서쪽으로 넘어가는 해 그림자가 더 길게 들어와 있었다
그 사내,
산책을 나왔다
길가의 코스모스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그에게 남은 날이 얼마나 될까?...
선득하니,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그림자가 저녁 햇살만큼이나 한층 더 길어진 가을저녁
그에게 남은 날은 더 짧아 지는데
그 사내,
노을속에 혼자 서있다
그 사내 12.
그 사내...
진정한 지옥은 내가 이 별에 왔는데
약속한 사람이 끝내 오지 않는 것이다.
사랑한다고,
그립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주별 여행자의 사랑 - 류 근
그 사내 13.
나는 아직 무사히 쓸쓸하다네
하루가 얼마나 짤막한지 알지 못했다면
단 하룬들
나, 참지 못했으리.
배를 타려 하네.
섬.
깊은 독서 끝에 처박혀지는.
- 황인숙의 '비유에 바침'에서 발췌 -
그 사내 14.
그 사내,
알츠하이머 검사를 받으러 병원엘 갔다
- 오늘이 몇 일이죠? 의사가 물었다
아차, 날자를 잊고 산지 오래 되었다
- 지금이 가을이란것 밖에 생각이 안납니다
- 잘 기억해 보세요. 오늘이 무슨 요일입니까?
- 목요일.- 네, 잘 맞추셨습니다.
그런데 날자는 영 생각이 안나십니까?
의사는 그 사내의 뇌세포가 이미 많이 죽은것처럼 바라보며 재차 물었다
- 네, 불란서의 시인 '쟈크 프뢰베르'의 詩중에 이런 詩가 있지요
오늘이 몇 일일까
우리는 온 세월을 함께 살고 있지
사랑하는 그대여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고
살아가며 서로 사랑하고
우리는 세월이 무언지 모르고
삶이 무언지 모르고
우리는 사랑이 무언지도 모르지
그 사내, 낮은 목소리로 정확하게 시를 외우고 말했다
- 저는 시인들이 살아가듯 살아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의사는 놀라운 시선으로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 다른 시도 외우시는게 있나요?
그 사내는 아무말 없이 검사표를 들고 병원을 나왔다
가로수의 잎들이 붉게 물드는 맑은 가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