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내 I. II. III. IV.
그 사내 1
그 사내, 펀드매니저
"인생은 혼자 하는 게임 같아요
맑고 투명한 하늘 쳐다보듯 여자들을 쳐다보는 거예요
나무처럼 숲처럼 바람처럼 노을처럼.."
그 사내, 재즈 피아니스트
건반을 누르며 일어서는 그의 어깨 너머
보사노바, 8분 음표들 가득 실내를 채우며 떠돌고
나는 그의 손끝에 묻은 몇 개의 어둠을 들고
그 사내, 압축된 생애를 듣는다
격납고를 잃어버린 그 사내의 은빛 날개위로
때론 눈부시게 떠올랐을 햇살과 저녁 노을,
그 사내가 내려다 본 세상의 모든 아침과 저녁을
비, 혹은 눈 내리던 거리들을
모든 집들의 식탁과 화장실을
바람 부는 날 오후면 어김없이 밀려오던 쓸쓸함을
유리병 속에 갇혀있던 호텔의 장미 한 송이를
그도 장미를 좋아했을까
아니면 민들레?
문틈 사이 오래된 먼지처럼 눈에 띄지 않지만
익숙한 열정들 그러나
지상엔 격납고가 없는 그 사내,
낮엔 펀드매니저,
밤엔 재즈 피아니스트인.
그 사내 2
늘 혼자 서 있네
바람 부는 언덕이나
텅 빈 거리 모퉁이
비스듬히,
혹은 구겨진 채 앉아
담배나 태우고 있는
그 사내
가슴을 열면
크고 작은 나사못이
와르르 쏟아질 것 같은
낡은 욕조 같은
핏줄 속으로 녹슨 물이
흐르고 있을 것 같은
그 사내,
늘 혼자 서 있네
그 사내 3
그 사내
詩를 쓰지, 마스터베이션처럼 습관으로.
오후엔 종로에서 펄럭이다가
슬그머니 근처 주점으로 스며들어
흐린 속을 적시는 그 사내,
詩를 쓰지, 비틀거리는 거리에서
넘어지고 일어서며
詩를 오독 하듯
生을 오독 하는 그 사내.
사실 나는 그 사낼 잘 몰라
다만 공해 속에 널려있는 빨래 같은
머리 속엔 분명 공해의 비듬을 기르고 있을
그 사내,
詩를 쓰지,
사랑 따위는 결코 믿지 않으면서
사랑 없이 못사는 그 사내.
그 사내 4
몸속에 꿈틀대던 늑대의 유전인자,
세상과 불화하며 광목 찢듯 부우욱
하늘 찢으며 서슬 푸른 울음 울고 싶었다
곧게 꼬리 세우고 송곳니 번뜩이며
울타리 침범하는 무리 기함하게 하고 싶었다
하늘이 내린 본성대로 통 크게 울며
생의 벌판 거침없이 내달리고 싶었다
배고파 달이나 뜯는 밤이 올지라도
출처 불분명한 밥은 먹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불온하고 궁핍한 시간을
나는 끝내 이기지 못하였다
목에는 제도의 줄이 채워져 있고
줄이 허락하는 생활의 마당 안에서
정해진 일과의 트랙 돌고 있었다
체제의 수술대에 눕혀져 수술당한 성대로
저 홀로 고아를 살며
자주 꼬리흔들고 있었다 머리 조아리는 날 늘어갈수록
컥, 컥, 컥 나오지 않는 억지울음
스스로를 향해 짖고 있었다
- 이재무의 <울음이 없는 개> 全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