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獨白
禪 Series XII / 산그늘 - 박규리
Chris Yoon
2021. 11. 10. 06:24
산그늘
먼산바라기만 하던 스님도
바람난 강아지며 늙은 산고양이도
달포째 돌아오지 않는다
자기 누울 묘자리밖에 모르는 늙은 보살 따라
죄 없는 돌소나무밭 돌맹이를 일궜다
문득,
호미 끝에 찍히는 얼굴들
절집 생활 몇 년이라면 나도
그만 이 산그늘에 마음 부릴 만도 하건만,
속세 떠난 절 있기나 한가
미움도 고이면 맛난 정이 든다더니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사람들이
하필 그리워져서
눈물 찔금 떨구는 참 맑은 겨울날
* 출처 : 박규리 시집 / 창비 <이 환장할 봄날에> 중에서
박규리-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나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정을 수료했다.
박규리 시인은 지난 1996년부터 지금까지 전북 고창에 있는 미소사에서 공양주로 절 살림을 맡아오고 있다.
등단 직후부터 8년여 동안 속세를 등진 채 외롭게 시를 써온 것.
시인이 처음 절을 찾게 된 것은 몸과 마음의 깊은 상처 때문이었다고 한다.
시인은 '공양주'로서, 성과 속의 세계 사이를 왕래하는 자로서 시를 쓴다.
시인이 절에서 겪는 일상에는 과장이 없다. 박영근 시인은 이를 가리켜 '절집세계의 일상과 삶의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씌어졌기 때문이라 말한다.
미처 털어내지 못한 세속적 욕망, 이때문에 갈등하는 내면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시인은 점차 깨달음을 향해 나아간다. 속세의 미련과 욕망을 떨치고 '참 나'로 나아가는 과정이 담긴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