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獨白

명동 연가(明洞 戀謌)

Chris Yoon 2021. 11. 9. 00:15

명동(明洞). 한자 그대로를 풀이하자면 밝을 명, 마을 동. 우리나라에서 제일 밝은 동네라는 뜻이다.

그렇다. 명동은 내가 알기로는 언제나 밝고, 화사하고, 청춘들의 재잘거리는 해맑은 웃음소리와 유행이 앞서던 동네였다.

내가 60년대 말에 고등학교를 다니던 덕수궁 돌담길에서 나와 시청앞 광장을 가로질러 조선반도호텔 길을 따라 걸으면

좌측 조선호텔 맞은편으로 미도파 백화점이 나오고 미도파 백화점 5층이었던가? 맨 꼭대기층으로 올라가면 극장식 무대가 있는 대형 뮤직홀에서 매주 토요일이면 키보이스를 비롯한 보컬구룹들이 몸을 흔들며 연주하는 것을 볼 수 있고 가끔 미국에서 온 윤복희와 그의 약혼자 유주용도 볼 수 있었다.

미도파 옥상에서 보면 명동입구에서 부터 쭉 곧은 길이 도로 건너편에 보였고 그 길은 참으로 신기하게도 나를 끌어 당기며 부르고 있는듯했다.

 

60년대말 명동입구에는 아치로 된 시계탑이 있었고 청춘들은 그 시계탑아래서 약속을 하기도 했다.

시계탑을 지나 들어서면 좌측으로는 명동극장이 있었다.

그곳에서 무슨 영화를 보았던가?

조금 더 들어가면 일정시대때 지은 아주 오래된 명동 국립극장이 있었다.

그 좌편으로는 내무부가 있어서 우리는 을지로입구에서 들어올때는 그 골목을 내무부 옆 골목이라고 했다.

을지로에서 들어서며 좌측으로는 내무부가 있고 우측으로는 설파다방이 있었다.

설파다방은 전문적인 클래식 음악만 틀어주는 곳이라서 음악을 전공하는 지식인들이 많이 찾아와 오랜시간 동안 앉아서 음악을 듣던 곳이었다.

나는 이곳 설파다방을 자주 들리며 그때부터 클래식 음악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다.

 

설파다방에서 계속 들어오면 명동 사거리가 나오면서 국립극장이다. 이곳은 내가 잊을 수 없는 곳이기도하다.

서울예고 시절 연말이되면 음악회가 있는데 그때 우리는 두달쯤 맹연습을 하여 메시아 [Messiah] 중 '할렐루야[Hallelujah]'를 발표했었다.

지금도 반세기가 흘렀건만 할렐루야 베이스파트를 모두 외우고 있다.

 

국립극장 마즌편에는 자양센터라는 전기 통닭구이와 생맥주를 파는 제법 큰 가개가 있었는데 무우절임과 나오는 통닭구이와 1,000cc 생맥주는 우리에겐 최고였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우리는 이곳으로 와서 회식을 하기도했다.

그 옆 골목은 순두부, 해물탕등 작은 맛집들이 꽤많이 있었고 좌편으로는 계단길을 걸어 깊숙이 들어가 '뜨락'이라는 분위기가 제법 고급스럽고 넓은 레스트랑이 있었다.

회사근무를 마치고 데이트를 할때면 으례히 '뜨락'으로 들어가서 기분을 내곤했다.

 

국립극장 사거리에서 고개를 오르면 명동성당이 나오고 명동성당 아랫쪽엔 성모마리아가 있고 성모마리아 앞엔 항상 무릅을 꿇고 기도하는 조용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좌측엔 명동성모병원이 있다. 그때는 명동성모병원에서 충무로로 넘어가는 길에 작은 성모병원 건물이 있고 그 병실을 이어주는 육교가 있었다. 그 위에 또 청계천에서 연결되어 남산터널로 이어지는 고가도로가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철거되었다.

명동성당을 지나 고갯길을 내려가면 중앙극장이 있었다.

거의 외화를 상영하는 극장이었는데 나는 이곳에서 숀 코네리가 나오는 007, 비치파티 등 많은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대학을 들어가면서 고등학교 딱지를 떼고 그 유명했던 끌로드 를루슈( Claude Lelouch)감독의 '남과 여(Un Homme Et Une Femme)'를 이곳에서 늦은 밤에 보았다.

 

좌/ 명동 안쪽에서 본 미도파 백화점 방향. 좌측으로 가면 중국대사관이었다. (1966)

우/ 미도파 옥상에서 본 명동 입구. 시계탑이 있는 아치가 보인다.(1967)

 

 

내가 한창 즐겨 드나들던 70년대의 명동. 마즌편에 미도파 백화점이 보인다.

미도파백화점에 부착된 산타클로스를 보아서 연말이었던듯. 들뜬 거리의 인파가 활기차 보인다.

 

 

명동 사거리의 명동국립극장. 지금은 명동예술극장으로 불린다. 좌측의 텅 빈 건물이 자양센터 (전기통닭구이) 자리.

 

명동을 나와 건너편 충무로방면에서 본 명동. 좌로 보이는 건물이 명동성모병원, 맨 가운데가 로얄호텔, 우측에 중앙극장이 있었다. 도로 위로는 성모병원과 현재의 평화방송 사옥을 연결하는 육교와 청계천에서 남산까지 고가도로가 있었는데 시원스럽게 철거되었다.

 

 

나는 몇 일전 흑백사진 한 장과 카메라를 가지고 명동으로 나갔다.

옛날 내가 즐겨 다녔던 명동을 비교하고 싶어서였다.

이 사진은 내가 드나들던 전기구이집 자양센터와 국립극장이 있는 명동 사거리에서 찍은 사진이다.

우측의 노란 건물이 국립극장이다.

 

그런데...

그 명동이 조용하다.

코로나19로 된 서리를 맞고 중국인, 일본인 관광객도 발길이 끊겼다.

명동의 골목마다 물끓듯이 넘쳐나던 사람들, 길거리까지 빼곡하던 좌판들, 퍼포먼스를 펼치며 눈길을 끌던 삐에로들도 보이질 않고 소형 점포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이 명동이 그 명동이었던가,

골목마다 활기차고 멋을부린 젊은이들이 넘쳐나고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중국인과 일본인들이 몰려들어 이곳이 대체 어느 나라인가! 스스로 반문할 정도의 국적을 알 수 없던 명동.

그들이 찾아와 머물던 게스트하우스도 폐업들을 단행하고 점포들도 속속 폐업후 이참이라는듯 수리를 하고있다.

언제까지 갈것인가. 중세기의 흑사병보다 더 무서운 전염병이 판을치는 이 불경기는.

그래서 취업을 못하고 소자본금으로 문을 열었다가 월세도 못내고 자포자기하는 젊은이들의 낙담[落膽]은.

 

 

- Chris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