殘雪 II
해가 닿지않는 북쪽에는 내린 눈이 그대로 쌓여있다.
殘雪...
겨울나무들이 앙상하게 서있는데
누군가 숱하게 밟고 오르내린 흔적들.
무던히도 心亂한 마음을 달래고저 애쓴 사색의 흔적들이다
저 흔적들, 봄이 와도 그대로 남겨졌으면 좋겠다
殘雪을 밟고 올라가 보니
가슴에 응어리진 恨을 뭉쳐 눈사람을 만들어놓았다
누군가?...
그런데 눈사람이 함께 서있는 모습이 아니다
남자가 떠나가고 여자가 뒤따라 오고있다
여자가 부르는데 남자는 못 들어척 갈 길을 간다
그렇지, 이별은 저렇게 하는것이다
내 속이 다 후련하다
여름부터 늦은 가을까지 꽃 피웠던 장미넝쿨에
마른 꽃 한 송이가 남아서 바람에 운다
그꽃을 꺾어 집으로 가져온다
시든 꽃, 마른 꽃.... 젊음이 다 한, 생식능력을 잃은 사내를 보는듯 하다
안소니 퀸(Anthony Quinn)과 이브 몽땅(Yves Montand)은 여든 나이에도 아들을 낳았다는데...
늙을수록 멋 있는 사내들이었다
언덕 위, 향나무에 殘雪이 아주 조금, 두 손바닥을 합친 만큼 남았다
가만이 바라보다가 그 이유를 알아내고 빙긋 웃었다
그림자가 오래 머물던 곳엔 눈이 녹지를 않았다
나무의 그림자... 나무를 사랑했던 그림자는 눈마저 녹일 수 없었나보다
내가 평생을 따라다닌 그림자는 누구였나?...
그리고 나를 따라다닌 그림자는 누구였을까?
Dead Mask가 걸린 자작나무 숲에도 殘雪이 남았다
Dead Mask는 겨울내내 혼자서 자작나무 숲에 내려쌓이는 눈을 보았고
殘雪이 녹아 흔적없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고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봄이 오고 자작나무에 물이 오르며 새잎이 돋아나면 이야기 할것이다
지난 겨울 혹독했던 추위와 다시 오지않을것같던 봄날에 대해서.
저녁호수에 해가 기운다
온통 황금빛이다
저 황금빛 얼음 위에 돌을 던져 물수제비 하나 떠볼까?
아서라. 그 돌맹이 얼음위에서 한겨울을 보내고
그 얼음이 녹아 아래로 내려앉을때까지 얼마나 덧없고 쓸쓸하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몇번인가 세다가 틀려서 다시 세었다
그래도 아직 정확히 세지를 못했다
겨울나무에 왠 까치집이 저렇게 많을까?
강남이 처음 들어서고 아파트가 세워지던 아주 오래전, 그때가 생각난다
그때, 저 까치집같던 아파트 한 채 갖고싶어서 얼마나 애를 태웠던가?
그리고 그 아파트 한 채 사려고 얼마나 많은 세월을 새벽부터 늦은밤까지 씨름을 했던가?
나의 자서전같기만한 빈 까치 둥우리 아래에 한동안 서있었다
집이 있었다면 우리는 겨울들판에서 떨지않고 들어갔을것이다
그리고 서로 따뜻하게 체온을 녹여주고 정사를 나누며 우리는 행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들어갈 집 한 칸 없어서 각자 갈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저 두 마리의 솟대같이...
오늘따라 헝클어진 머리풀고 바람에 우는 저 앙상한 겨울나무 사이로
서로 다른길을 가야하는 목각새 두 마리가 오래된 과거처럼 눈물겹게 안쓰럽다
'사랑만으로는 살 수 없단다'
사랑을 믿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슬픔이 옹이처럼 남아 흰새가 되었나?
윤회(
輪廻)의 길목에서 가끔 만나던 목이 긴 새가 날아간다
이젠 잊으라고, 그만 잊어버리라고 말하면서...
이제 얼음도 풀리는 봄이오면
내 마음도 풀리겠지...
그때 말하리라, 지난 겨울은 무척이나 혹독하고 추웠노라고.
Chris Nicolas